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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中,日 “눈물겨운 인생” 이케다 스미에(池田澄江)의 중국정

왜! 쑈르번꾸이즈 일까? 한 잔류 일본고아의 눈물겨운 인생 이야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패전 시, 중국에 있었던 155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은 철수하게 되었다. 피난길에 갓 태어난 아이들과 이동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살리고자 중국인들에게 자식을 맡기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남겨진 아이들이 오늘날의 ‘잔류일본인고아’들이다.

1972년 중일관계가 정상화되면서 그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1981년에 첫 잔류고아방일조사단이 육친혈연조사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8년 12월 31일까지 2만 907명의 잔류고아와 그 가족들이 일본에 영주귀국을 하였다.

도꾜에서 만난 현재 중국귀국자•일중우호회(中国归国者•日中友好会)의 이케다 스미에(池田澄江) 회장이 바로 그들 중 한사람이다.

하필이면 내가 왜 쑈르번꾸이즈(小日本鬼子)일가?

1940년대 말,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제일 번화한 유신(維新)시장 부근에 부모님 사랑을 유난히 받고 있던 서명(徐明)이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일곱 살 해에 소학교 1학년생 이었던 서명은 학교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항일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 속 일본병사들의 만행을 보면서 어린 서명은 분노의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에 무언가가 날아왔다. 뒤돌아보는 순간 같은 반 친구들이 돌아가며 폭력을 가했고,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일본놈새끼(쑈르번꾸이즈)” 선생님의 보호로 힘겹게 집에 돌아온 서명은 울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내가 왜 쑈르번꾸이즈예요?” 그런데 엄마는 놀라지도 않은 채 그게 별명이라며 서명을 안아 주었다. 그날 이후로 서명은 왜 그런지 모르게 자기를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의 눈길이 예상치 않아 늘 불안했다.

그해를 지나 1953년 서명이가 여덟살에 공안국에서 한사람이 서명이네 집에 찾아왔다. “당신 딸이 일본아이가 맞습니까? 일본사람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정책이 나왔습니다.” 이에 서명이의 신상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엄마는 서명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그의 생모가 다섯 아이를 데리고 목단강에 있는 일본난민수용소에 피난을 가게 되었다. 피난길에 모유가 나오질 않아 생모는 이씨 성의 목수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은 채 제발 아이를 살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목수는 당시 아이가 없었던 서명의 양부모에게 500대양(大洋:당시 유통되던 은화의 단위)을 받고 아기를 팔았다.

서명이가 아홉 살 되던 해, 양부의 사업실패로 집안생활이 일락천장이 되었다. 빚 때문에 양부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두 모녀는 생활고와 빚쟁이들의 시달림에 지칠 대로 지친 엄마였지만 일자무식 이였던 자기와는 다르게 서명을 키우려고 마음먹었다. 힘들고 지쳐도 서명의 학교공부를 중단시킨 적 없었던 엄마는 매일 서명의 공부가 끝나기를 기다려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런 엄마의 정성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서명은 어린 시절 영화관에서 ‘일본놈새끼’로 몰리고 있는 자기를 감싸주던 선생님을 보면서 늘 교원의 꿈을 키워왔던 서명은 목단강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림임업국 홍기림장 서남차림장(西南岔林场)소학교에 배치 받아, 그 곳 임장의 한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다.
서명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늘 잊을 수 없는 한마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쑈르번꾸이즈’, 왜 하필이면 내가 일본사람 자식일까?


나는 누구일까?
1972년, 중일양국 국교 정상화가 실현되었다. 그 이듬해에 학교의 배려로 목단강 시내에 전근하게 된 서명은 집 천정에 붙어진 신문지에 ‘중, 일’이라는 두 글자에 자주 눈길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소학교 때 남의 눈을 피해 지구의에서 가만히 찾아보았던 ‘일본’이라는 나라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원망하면서 살았던 친부모가 대체 어떤 사람이며, 왜 자기를 버리고 갔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한편 양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아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낳아준 부모를 찾아 온갖 고생을 겪으며 자기를 키워준 엄마에게 꼭 은공을 갚고 싶기도 했다. 서명은 엄마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엄마는 즉시 서명이를 이끌고 옛날 살던 동네에서 좀 떨어진 이씨 성의 목수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는 친부모를 찾을 만한 단서가 남아있지 않았다.

1980년, 목단강을 방문한 한 일본기자가 서명의 사연을 기사로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혹가이도(北海道)의 요시가와(吉川)라는 한 노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당시는 잔류일본인에 대한 조사가 다시 시작된 때여서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서신거래가 시작되었고, 최후 확인이 필요한 잔류고아들이 일본을 방문할 때였다. 요시가와의 요청으로 서명은 6개월간의 친척방문비자를 받고 1981년 7월 24일에 어린 세 아이를 데리고 일본 흑가이도로 향했다.

도착 후, 친자확인수속을 밟는 과정에 확인증거가 부족하다고 여긴 일본정부는 DNA 감정을 요구했다. 석달이 지난 후 친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감정서를 받은 요시가와의 태도는 일변했다. 하루아침에 서명은 가짜증거를 만들어낸 사기꾼으로 되어버렸다.

기가 막혔다. 혼자 몸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었지만 딸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 어찌할 수도 없었다. 바로 중국에 돌아가면 평생 ‘가짜일본고아의 자식’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야 할 세 아이의 장래가 걱정되었다. 우선 요시가와의 집에서 나오기 위해 서명은 혹가이도 법무부에 찾아갔다. 그런데 중국법원에서 발급한 일본혈통고아증명서를 일본에서는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자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 강제송환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는 그들의 대답에 서명은 억장이 무너져 말문이 막혔다.

서명은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던 끝에 친자확인 수속을 밟는 과정에 번역을 맡아주었던 번역사무소가 생각났다. 어렴풋이 들었던 빌딩 이름 하나로 택시를 타고 번역사무소를 찾은 그는 결국 그 분들의 도움으로 혹가이도 중국영사관을 찾아가게 되었고 자신의 처지를 알리게 되었다. 영사관에서는 요시가와에게 전화로 “서명은 아직 중국공민이다. 우리는 우리공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서명을 털끝 하나 다치게 하면 우리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거주할 수 있는 집도 마련해주었다.

영사관 직원들의 도움으로 1981년 12월 17일에 도꾜에 도착한 서명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하여 며칠 동안 거리를 방황했다. 한해가 마무리 되어가는 어느 날 밤, 도꾜의 샨데리야 불빛 아래에 안데르쎈 동화속의 ‘성냥 파는 소녀’처럼 가냘픈 모습들이 비춰졌다. 아이 셋을 거느린 일본인잔류고아의 불쌍한 모습이 12월 22일의 〈아사히신문〉 기자의 사진보도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명사건’은 일본은 들썽거리기 시작했다. 사쿠라공동법률사무소의 가와이 히로유키(河合弘之)변호사가 서명을 돕겠다고 나섰다. 이에 1982년 6월 2일, 서명은 친부모를 확인하지 못한 채 일본국적을 가진 첫 잔류고아의 한사람으로 되었다.
37년을 서명으로 살았던 그는 자기를 성심성의껏 도와준 번역사 성인 이마무라(今村)의 성을 따르고 양부모가 지어준 명(明)자를 남긴 이마무라 아키코(今村明子)로 호적을 올리게 되었다.

운명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1987년 2월부터 사쿠라공동법률사무소에서 번역직원으로 근무하게 된 서명은 가와이변호사와 함께 전쟁고아들의 국적취득을 돕게 되었다. 그동안 약 1300명 잔류고아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을 만큼 전쟁고아들의 사연은 기막혔다. 이마무라 아키코로는 일본국적을 받고 경제형편이 안정되자 남편을 잔류고아가족의 신분으로 일본에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때서야 다섯 식구가 단란하게 모여 살게 된 서명은 친부모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채 13년 세월을 보냈다.

1994년 12월 4일, 변호사사무소에서 조직한 전쟁고아 설명회가 있었다. 통역을 맡았던 서명은 설명회가 끝난 후 몇몇 전쟁고아들과 함께 평소에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커피숍에 들어가게 되었다. 때마침 함께 활동에 참가했던 일본여성 두분이 커피숍에 들어왔다. 그중의 한분이 서명에게 물었다.
“이마무라씨는 어떻게 중국어가 그렇게 유창해요?”
“저도 전쟁고아입니다. 13년 전까지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살았습니다.”
“목단강? 성은? 몇 년생이예요? 우리도 거기서 살았는데… 우린 10개월 된 동생을 이씨 성을 가진 집에 두고 왔습니다.”
“저도 이씨 집에서 좀 살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성은 서가입니다.”
“이씨는 뭐하는 분이였습니까?”
“목수…” 두 여인이 서명에게 목단강시 어느 마을에서 살았는지, 그 당시 지도를 그려줄 수 없냐고 간청했다. “여기가 목단강 일본인 난민수용소, 여기가 기차역, 여기가 이목수네 집, 여기가 태평로, 여기가 일본인 거리…”
양모에게서 듣고 또 들었던 당시의 마을 모습을 서명은 상세하게 그렸다. 갑자기 두분 중 한분이 외치듯 말했다. “네가 내 동생 스미에(澄江)야!” “설마… 아닙니다.”
“스미에, 나 큰언니야. 너를 이씨 목수네 집에 보낼 때 내가 같이 갔었어. 엄마가 너를 살리려고 널 남기고 왔어…”
그 분은 자기가 그 때 여덟살 이였던 큰언니라고 서명을 붙들고 흐느껴 울었다. 어서 같이 집에 가자고 손을 잡아끄는 그 분들을 보면서 서명은 냉정하게 말했다.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확실한 게 없지 않나요?”
아무리 비슷한 상황이라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가족을 찾는다는 기쁨보다도 가족이 아닐 경우의 실망이 더 무서웠다. 가와이변호사와 상담한 서명은 실망할 각오로 일본 후생성(厚生省)에 친자매 확인 DNA감정을 의탁했다.
신중에 신중을 가하며 그들의 DNA감정은 도꾜,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가고시마 등 다섯 곳에서 진행되었다. 행운만을 빌었던 17개월이 흘렀다.

1996년 7월 31일, 세 사람은 일본 후생성에서 결과를 확인해 보라는 통보에 무거운 심정으로 회의실에 모였다. 친자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기자들이 모인 회의실에서 조심스럽게 결과가 발표되었다. 99.9%의 확률로 세 사람은 혈육감정을 받았다. 그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오른 서명은 믿을 수 없어서 감정서를 몇번이고 들어다보았다. 서명으로 37년을 살았고 13년을 이마무라 아키코로 살아온 그는 그때서야 진정한 자기를 찾게 되었다. 이름은 이케다 스미에(池田澄江), 1944년 10월 14일에 태여난 원숭이띠였다. 양모 집에 왔던 날을 생일로 정하고 살았던 닭띠의 서명이가 하루만에 한살 더 먹은 셈이다. 호적에는 ‘사망’으로 표기되어 있었고, 막내였던 자기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나 있었다. 생부는 시베리아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일본에 돌아온 후 2년만에 병으로 별세했고, 생모는 DNA 감정이 끝나기 반년전에 돌아가셨다고 언니들이 말해주었다. 며칠 후, 부모님 묘소로 찾아간 이케다 스미에는 절을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엄마, 왜 나만 버리고 왔어요? 왜?”
인생을 통채로 바꿔놓은 세월이 원망스럽다고, 죽더라도 엄마 품에서 죽는 것이 행복이었을 수도 있었다고,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생모를 부르고 또 불렀다.

52살이 된 해에 진정한 자기를 찾은 이케다 스미에는 자신을 행운의 고아라고 하면서 결코 모든 고아들이 다 그처럼 순조로운 귀국생활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패전이라는 준비 없는 혼란 속에서 친족간의 증거물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일부 브로커들에 의한 가짜 일본인고아들이 하나, 둘 고발되면서부터 부모외의 가족들이 아예 혈육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 일본에 귀환된 70%에 달하는 잔류고아들이 아직도 혈육을 찾지 못하고 고아인 채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최저생활보조금외에는 전쟁고아들의 생활보장에 대한 일본정부의 특별정책이 없었다.
패전 40년 만에 돌아오기 시작한 전쟁고아들 대부분이 40살을 넘어섰다. 언어의 장벽과 그동안의 인적인 공백으로 인해 가족들 사이에서 짐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고립된 위치에 있었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전쟁고아로 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임은 일본정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이케다 스미에는 전쟁고아들의 창구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2001년, 우선 관동지구에서 중국귀국자의 인권과 노후생활 보장을 요구하는 〈국가배상소송원고단〉을 결성하고 집단소송을 일으켰다. 그 후 전국적으로 15곳에서 원고단이 결성되었고, 잔류고아의 90%에 달하는 2,213명이 원고로 나섰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 시위행진을 했고 113만명 일본인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일본인 변호인단과 일부 국회의원들의 협력, 그리고 사회 여러 면의 지원을 받으면서 5년간 분투해온 소송은 결국 패소로 끝났지만, 일본사회에서 강렬한 방향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잔류고아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7년말, 일본정부는 ‘중국잔류일본인지원법’을 발표하였다. 2008년부터 국민연금의 전액 지불과 생활보조금 지불, 활동비 지불, 거주주택비와 의료비의 면제 등 새로운 정책이 실시되었으며 각 지역에서의 일본어교실과 교류활동이 조직되었다. 남은 과제는 지속적으로 해결해가는 방향을 정하고, 안정된 노후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잔류고아들에게도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했다. 이에 2008년 3월 집단소송중에 결성된 단결력과 사쿠라공동법률사무소 가와이 변호사의 도움으로 NPO법인 ‘중국귀국자•일중우호회’를 세웠고 이케다 스미에씨가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2009년에 개설된 ‘중국잔류고아의 집’

2009년에 ‘잔류고아의 집’ 개설과 함께 귀국고아들의 심리상담, 잔류고아 2세와 3세의 취직상담, 일본어교실, 탁구교실, 노래공부 등 활동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어 현재 관동지역의 383명의 회원들이 등록되어 있는 ‘잔류고아의 집’은 잔류고아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곳으로 마음을 나누고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동의 ‘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010년에는 60대와 70대의 잔류고아 40명의 힘으로 ‘만두공방’을 오픈했다. 손으로 손수 빚은 만두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외계의 지원에만 의탁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자체의 힘으로 활동자금을 마련해가고 있다.

이에 사회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한 잔류일본인고아들이다. 중국에 버려졌다가 조국이라고 찾아 돌아온 그들에게 중국에 돌아가라고 찬 시선을 던졌던 사회가 따뜻한 눈길을 주기 시작하였다. 받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케다 회장을 비롯한 모든 잔류고아들의 마음에서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이다. 큰 도움이 못 되더라도 재해민들에게 정신적인 안위를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잔류고아들이 나섰다. 지진이 발생한 지 한달도 넘지 않은 상태라 전반 동일본지구가 사회적인 혼란상태에 처해있었던 4월초였다. 대형버스 석대로 이와테현 리쿠젠 다카다(岩手県陸前高田)시에 찾아간 그들은 현지에서 물만두 9,000여개를 빚어 재난민들에게 대접했다. 밤길로 다시 도꾜에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그들은 곤란한 시기에 도움을 받았던 자기들이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답할 수 있다는 것에 자긍심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중국은 영원한 고향
“부모가 준 생명을 중국이 지켜주고 키워주었습니다.” 이케다 회장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일본은 나의 조국이고 혈통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중국은 나를 살려주고 키워준 영원한 고향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중일 두 나라는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일본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동북의 한어가 몸에 배인 이케다 회장은 절대적인 중국 동북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자가 가족을 찾은 후의 그의 솔직한 심정을 물었다.

“진정한 나이와 이름을 찾고 혈통을 알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하지만 가족을 찾지 못했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요. 형제자매들 사이에 같은 추억이 없어서 항상 끼이지 못해요. 혈육이지만 너무 다른 문화를 갖고 있어서 항상 금 밖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친 혈육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양부모와 함께 살았던 고향 목단강에서의 지난 추억이 가장 깊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이케다 회장은 그것이 모든 잔류고아들의 똑같은 마음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2005년에는 잔류고아들의 처지가 안정되지 못했던 시기로 단체소송 많았다. 어느 날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흑룡강성방송국 법제프로그램 담당자였다.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다. 일본인고아를 정성 들여 키워줬더니 일본에 귀국한 후 86세의 양모에게 한번도 연락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나러 온 적도 없다. 라고 양모의 자식들이 그를 상대로 배은망덕한 일본인이라고 소송을 걸었다고 전하며, 현재 중국 현지 매체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은 사카모토(坂本)성으로 살고 있는 잔류고아였다. 그를 찾아간 이케다 회장은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했다. 사카모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머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혼자 일본에 온 그가 성인이 된 세 자식을 일본에 데려와서 같이 살아가려면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하고 세금을 내어야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형편에서 제일 최하층의 일을 해야만 했던 그는 설상가상으로 불편한 다리 때문에 실업자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처지에 있었던 그에게 하루하루가 고역같은 생활이었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이케다 회장은 이번 같은 일은 사카모토 한사람의 일이 아니라 잔류고아들의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호간의 오해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얼마 후 무서운 현지 여론을 무릅쓰고 사카모토씨와 함께 할빈으로 향했다. 그는 잔류고아들을 대표하여 그들의 고민과 처지, 울분을 토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방송프로그램 담당자에게 부탁했다. 두려움에 감히 앞에 나서지 못하는 사카모토를 대변하여 TV 화면을 통해 잔류고아들에 대한 당시 일본정부의 어처구니없는 대우와 기구하다 할 만큼 곤란한 잔류고아들의 실제생활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상세히 설명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잊은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힘을 합쳐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꼭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때가 되면 당신들의 자식들 모두가 당신들을 뵈러 올 겁니다.” 열렬한 박수 속에서 양아들인 사카모토와 양모가 만나게 되었고, 장내는 눈물바다에 잠겨버렸다. 이해와 화해가 뒤엉키는 순간이었고 모자간의 정이 다시 끓는 시간이었다.

국경 60주년을 맞이한 2009년과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이한 2015년에 이케다 회장은 약속대로 ‘감은단(感恩团)’을 설립하여 할빈과 북경을 방문했다. 키워준 양부모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중국인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의 약속이 있었다. 2007년 당시 중국 온가보 총리가 일본방문길에 잔류고아들을 찾아주었다. 그 때 대표로 꽃다발을 드렸던 이케다 회장은 총리에게 이런 말씀을 올렸다. “부모가 준 생명을 중국이 지켜주고 키워주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 꼭! 보답하겠습니다.”

2008년 5월, 사천성 문천현에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한 이케다 회장은 총리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지금이 바로 그 약속을 실현해야 될 시기라고 생각한 그는 각 지역의 잔류고아대표들과 전화로 토론했다. 그들은 잔류고아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일본 전국의 잔류고아들을 동원했다. 평소에 아껴 먹고 아껴 쓰던 돈이었다. 전철 한역 정도는 돈을 절약하려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선뜻 만엔씩 기부하기 시작했다. 지진이 발생된 후 5일 만에 500만엔, 8일째 되는 날에는 천만엔이 모였다. 짧은 기간내에 모아진 1,750만엔을 들고 일본주재 중국대사관을 찾아갔을 때 대사관 직원들은 선뜻 기부금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생활형편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일본주재 중국대사관 직원들이기 때문이었다.

2년 후인 2010년 5월, 그들이 기부한 기부금으로 재건된 사천성 미산시 인수현(眉山市仁寿县)의 〈중일우호태산촌소학교〉 락성기념식에 80명의 잔류고아들이 참석하게 되었다. 새롭게 컴퓨터 6대를 증정한 동시에 매 학생들에게 책가방과 학용품을 선물한 이케다 회장 일행은 은공을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했다.

현재 일본에 있는 잔류일본인고아는 2,600명, 나이는 75세부터 88세 사이이다. 인권문제, 노후대책, 2세와 3세 문제 등 많은 과제를 짊어진 채 역사의 또 다른 한 페이지를 써가고 있는 그들은 전쟁의 무서움과 잔인함을 존재 자체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들은 쟁탈과 박탈의 무서움과 잔인함을 전하는 동시에 인도주의적인 중국의 양부모들에 대하여 대대로 일본인들에게 전설로 남길 것이다.

강의실에서 중국 노래 〈바다여, 나의 고향(大海啊, 我的故乡)〉을 부르는 그들의 얼굴표정에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고향-중국의 크기를 보게 되었다. 중국인의 자식이기도 한 그들은 중일친선을 오래도록 이어가야 하는 이유로 될 것이다.

정길종기자 gjchung11119@naver.com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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