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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복지

‘정근모 제4대 한림원장 특별인터뷰

정근모 제 4대 한림원장에게 듣는다.

특집기사

 

‘정근모 제4대 한림원장 특별인터뷰

정근모 제 4대 한림원장에게 듣는다.’

 

"내 꿈은 우리나라 젊은 과학자들이 전 세계를 품고 연구하는 것"

KAIST와 고등과학원 설립 산파…연구시스템 확립 기여
ICT 발전 위한 초석 마련…TDX 개발 시작으로 반도체 강국 발돋움
한국형 표준형 원자로 개발 추진해 기술자립 달성
한림원 제4대 원장으로 법적 지위 명기…위상 향상에 기여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 역임하며 과학기술입국의 밑그림을 완성한 과학기술행정가, KAIST와 고등과학원 설립을 제안한 선구자, 한국인 최초로 핵융합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표준형 원자로 탄생의 기반을 마련한 개척자. 정근모 제4대 한림원장이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가 됐다. 과학자로 또는 관료로 때로는 교수 및 엔지니어링 기업체 사장으로 우리 과학계에서 크고 작은 업적을 이룬 그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오늘날의 영광을 일궈낼 수 있었다. 
정근모 원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에서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최첨단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 대신 조국 땅에 ‘희망’이라는 밀알을 심는 것을 택했다. 그가 품은 희망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꿈을 이룰 수 있는 초일류 대한민국 건설. 그는 국민이 사람답게 살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겸허하게 자존심을 지켜내는 나라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그 신념을 현실화시켜줄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그 신념은 지금도 굳건하다. 

조국의 발전을 품은 정근모 원장의 희망이 꿈에 그치지 않고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떻게(how)’를 찾아내는 행동가였기 때문이다. ‘무엇(what)’이 필요한지 알아내서 요구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실제로 이뤄내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산수(傘壽)가 넘은 나이에도 불철주야 자신의 쓰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그를 한림원 원장실에서 만났다. 인터뷰 자리에서 꺼낸 하얀 종이 위엔 담대하고 사려 깊은 과학자의 역사가 꾹꾹 눌러 쓴 글씨처럼 또렷하게 담겨 있었다. 

 

‘답’찾아내는 행정가“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결정하자”


한국 현대 과학계의 살아있는 역사로 무수히 많은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교수님께서 현재 가장 관심을 쏟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기록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작은 것도 허투루 지나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또, 우리의 경제 능력을 높일 수 있는 모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델을 확립하기 위해선 시간이 오래 걸려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역할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굵직한 업적을 많이 쌓으셨습니다. 수많은 업적 중 스스로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은 무엇인가요?

 

저를 한국으로 다시 이끈 일이어서 그랬을까요? KAIST 설립은 제가 자랑스러워하는 성과이자 일생의 보람입니다. 또 KAIST가 처음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해준 것 같아서 많이 만족스럽습니다. KAIST를 통해 한국의 많은 석·박사가 배출됐습니다. 그들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일조했고요. 과학기술 입국을 이룬 진정한 주인공들이죠. 그 힘은 오랜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에서 나온 겁니다. 과학기술 두뇌를 해외에 뺏기지 않으려고 세운 KAIST가 세계에서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어요. 내년에 KAIST가 50주년을 맞습니다. 학교에서 자료를 모으는 등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케냐판 KAIST를 설립하는 일에도 몰두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넘어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진출하면 젊은 과학자들은 전 세계를 품고 마음껏 연구하고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KAIST 설립 당시에는 반대도 있었지요?

 

미국 뉴욕공과대학의 부교수로 있을 당시, 제 모교인 미시간주립대 총장으로 있다가 국무성의 국제개발처 책임자로 임명된 존 해너(John Hannah) 박사가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원조정책에 대해 제게 아이디어를 물어왔습니다. 저는 한국 내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국제 수준의 대학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했고, 해너 박사가 사업제안서를 들고 오라고 했죠. 밤새 쓴 보고서를 전달했더니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곤 곧 한국에 선물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지만 그 보고서가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1970년 3월 24일 귀국해서 브리핑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엄청난 반대도 있었지만 과학기술로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했던 사람들도 많았죠. 과학기술 자립을 위한 의지와 지혜, 국회의 입법 등이 맞아 떨어져서 KAIST가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 발전에 대해서도 원장님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시기상조라고 여겼던 한국형 표준형 원자로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셨습니다.

 

1982년 초,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고 있던 김재익 박사가 미국에 있던 저에게 간곡한 전화를 해왔습니다. 원자력연구소가 한국원자력기술주식회사(KNE)를 세웠는데 경영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요. 저는 과학기술 정책수단 연구 때 발표한 연구기관과 기술회사가 함께 발전해야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실질적인 국가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을 상기하면서 원전 건설을 이끄는 한전이 KNE에 투자해 원자력 기술자립을 지원하는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결국은 귀국해서 그 일을 맡게 됐는데 많은 사람들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던 원전 기술자립과 설계 표준화를 추진했지요. 선진국에서의 기술 습득은 쉽지 않았고 그때까지 우리는 낮은 수준의 기술만을 갖고 있었어요. 기술종속의 어두운 시대에 울분에 차 있는 과학기술자들을 보니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저는 우리 손으로 원전을 설계하고 건설해 운용하는 기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에너지 자립과 안전 기술 확보는 힘들다고 강조했어요. 다행스럽게도 참여한 과학기술자들이 공감했던 것 같아요. 힘든 과정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겨내 우리 손으로 한국형 원자로를 설계하게 됐으니까요. 국제 입찰을 붙여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CE)사가 개발한 원전 기술을 도입했지만, 규모가 달랐기에 새로 개발하는 것처럼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CE사의 사장은 미국 에너지성 차관 출신의 Shelby Brewer 박사였고 기술담당 부사장은 미국 원자력학회에서 같이 일했던 Frank Bevilacqua 박사인데 한국의 원자력기술 자립과 표준원자력발선소 설계, 건설에 아낌없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결국 우리 기술진은 주요 부품을 표준화하고 개량시켜서 기존 미국의 원전보다 안전성이 향상된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에 성공했고, 이 기술을 기반으로 아랍에미리트 수출의 기적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수출이 결정됐을 때 무척 경이롭고 감격스러웠어요. 한국이 전 세계 원전 기술을 이끄는 선진국가로 발돋움했다는 증거니까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탈원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환경을 보전하면서 전력을 충분히 안정적으로 충당할 수 있는 에너지원은 원자력이 유일합니다. 신재생에너지는 원전을 보완하는 수단이죠. 탈원전의 한계가 곧 드러날 수 있습니다. 21세기는 산유국이 아닌 많은 양의 전력을 효율적으로 친환경적으로 생산하는‘산전국(産電國)’이 이끌게 될 겁니다. 

 

2017년에 신고리 5·6호기 관련 시민들이 참여한 공론화위원회는 여러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건설 재개를 권고했습니다. 첨예한 대립이 있을수록 충분히 공부해서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미래지향적인 결정을 하면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정 장관님께서는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나 역임 하셨습니다.

과기인이 행정가로서 일하실 때 어떠한 철학과 자세가 필요할까요?

 

장관의 임기는 대체로 짧습니다. 1년 6개월 안팎이지요. 1994년 두 번째 임기 때는 김영삼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많이 하며 새로운 것을 많이 제안했는데, 감사하게도 대부분 들어주셨습니다. 올해 30주년을 맞는 우수연구센터(SRC, ERC)가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오히려 과기처 과장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짧은 임기 동안 반드시 해야겠다는 주요 사업을 이루기 위해 행사 초청이나 축사는 고사하고 일만 했지요. 기초과학분야 이론 연구를 위한 고등과학원, 최첨단 실험을 위한 국가핵융합연구소, 항공우주연구 종합사업 및 국제협력 강화를 위한 한·미과학기술협력센터 등이 그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입니다. 

 

한림원 법정기구화 성과 “한림원회원, 사회와 산업에 공헌야”

 

장관님은 우편 투표제가 도입되어 많은 회원들이 투표에 참여하게 된 후 최초로 선출된 원장입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계를 위해 노력했던 것을 한국의 최고 지성인 학자들이 인정해주었다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에는 항상 ‘옳은 일을 하면 언제고 알려진다’는 신념이 생겼어요. 

 

한림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저에게 격려도 되었지만 확신을 갖게 되었죠.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한림원장으로 일한 것보다는 한림원 후원회장으로 봉사하면서 한림원회관을 건축하는 데 일조할 수 있었던 것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정 장관님께서 원장 재임시 가장 큰 성과는 한림원 법정기구화 성공입니다.

장관님께서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노력한 숙원 사업을 달성 해 주셨지요.

 

법정기구가 되어야 단체에 대한 존중도 올라가고 안정된 예산 확보도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독립적인 ‘한림원법’을 원했지만 반대가 심해서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을 개정해서 한림원 설립과 지원 조항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른 기관의 반대가 심하자 과기부에서 선뜻 추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의원입법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국회의원들을 직접 찾아갔죠. 의원 입법에는 최소 10명의 국회의원 서명이 필요한데, 열 배 이상을 확보하자는 각오로 의원실 문을 두드리고 다니며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의 성의도 있고, 한림원 관련 일이라 좋아보였던지 다들 그 자리에서 서명을 해줬고, 의원 112명이 발의하는 데 동참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후 예산 확보까지도 난항이 계속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있었으나 그때마다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법사위원회에 올라온 120건의 안건 중 가장 뒤쪽에 있던 것을 8번째로 안건으로 올려 회기 내에 통과시켜준 것이 정말 고마웠고, 덕분에 2005년 7월 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기획예산처에 예산 항목을 넣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한림원의 역할을 인정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림원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운영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합니다. 미국한림원(National Academies)에 가보면 한림원 회원들이 자유롭게 방문하고 왕래하며 여러 정책연구와 자문 활동을 수행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한림원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한림원 회원 선출에 다변화가 필요합니다.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뽑기 위해 논문 중심의 연구업적을 보는 것도 있어야겠지만, 공학 분야는 산업에 얼마나 공헌했는가를 보는 것도 필요하지요. 사회나 산업계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 ‘가치창출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를 했는지를 평가하고 인정해주어야 하지요. 그렇게 되면 한림원 회원에 대학교수뿐 아니라 산업계 리더들, 정부 관계자들까지 폭넓게 구성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미래 한국을 이끌어갈 젊은 과학자들에게 조언

“가슴 뜨거워질 미래를 생각하며 꿈을 펼쳐라”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핵융합연구를 시작하셨고, 세계 최첨단 플라즈마 발생 장치 개발에 참여하시기도 했는데 연구자로서의 성공 기회 대신 귀국을 택하셨습니다.

 

사실 미국 유학 초기에는 제 공부가 우선이었어요.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에 들어간 이유도 당시 그 연구소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1964년부터 2년간 연구를 했는데,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핵융합 연구를 하게 된 셈이 됐습니다. KAIST 설립 이후에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독창적인 연구업적을 쌓을 수 있는 연구에 도전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 때 학생시절부터 존경하고 있었던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김법린 원장님은 제가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미국이 어떻게 과학기술을 일으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는지 알아내 대한민국 국민이 잘사는 데 기여하라고, 저에게 하나의 밀알이 되라고 하셨죠. 김 원장님은 한 나라의 과학기술 능력이 세계 선두에 서려면 3세대가 지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기초 기반을 닦는 1세대와 세계 수준급의 연구 활동을 전개해야 하는 2세대, 그리고 새로운 과학기술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3세대가 잘 연계되어 발전해야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선진국 수준이 된다는 말씀이었죠. 저는 미국의 3세대 대신에 한국의 1세대로서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작은 밀알이 되기로 결심했고, 기꺼이 귀국해 일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보람으로 가득 찬 일들이었습니다. 

 

미래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과학기술의 가치를 이해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미래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앞장서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의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하길 바랍니다. 큰 뜻을 가슴에 품고, 꿈을 펼쳐나가길 바랍니다. 대한민국은 과학기술로 일어선 나라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과학기술의 불씨를 새롭게 되살려야 경제가 살고, 그래야 나라에 활기가 생깁니다. 젊은 과학자들이 그 주인공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과감히 그 일에 열중해 보세요. 흉내 내는 연구보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과감한 도전자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계 발전을 위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을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물꼬는 터졌습니다. 과학기술을 국가의 원동력으로 사람 중심의 두뇌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새로운 가치 창출에 나선다면, 그리고 인류 공동체를 위한 꿈을 꾼다면 가능합니다.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합니다. 실천하면 됩니다. 과학기술경제라는 키워드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과학기술경제에는 지평선이 없어요. 무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어요. 기술혁신을 통해 새로운 경제를 일으켜서 우리도 잘 살고, 이웃도 잘 살게 만들면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꿈을 잊지 않고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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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표 창원특례시장,‘제63회 경상남도민체육대회 개회식’서 창원시선수단 환영·격려

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이동수 기자 | 홍남표 창원특례시장이 19일 밀양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된 ‘제63회 경상남도민체육대회’ 개회식에 참석해 시를 대표해 입장하는 ‘창원시선수단’을 뜨겁게 환영ㆍ격려했다. 개회식에서 16번째로 입장한 창원시 선수단은 ‘창원국가산업단지 지정 50주년 기념’ 캐치프레이즈로 입장했고, 이에 홍 시장은 선수단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영하면서 격려·호응했다. 제63회 경상남도민체육대회는 밀양시 일원에서 36개 종목에서 18개 시ㆍ군 선수 및 임원 20,000여명이 참여하여, 오는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4일간 열띤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창원시선수단은 관내에서 선발한 고등부, 대학부, 시청 직장운동경기부 등 우수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도내 최대규모인 선수 701명, 임원 및 지도자 339명 총 1040명의 선수단이 34개 종목에 출전할 예정이다. 창원시선수단은 이번 제63회 도민체전에서 우수한 전력으로 전 종목 상위권 입상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선수단 전원은 우수한 경기 성적 획득은 물론 스포츠정신에 맞는 플레이를 펼치며, 경남의 수부이자 스포츠 메카 도시 창원특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