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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용 목사, 케리토마스의 영성에는 9가지 색깔이 있다를 읽고서...

  • 등록 2024.07.23 18: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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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묵상주의 영성/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데일리연합 (아이타임즈M 월간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이성용 목사는 감히 말한다. 세상돌아가는 트랜드를 읽어라. 온누리에 복음을 전할 마인드를 가져라. 다양한 영성을 이해하며 서로 다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하고, 융합하여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이루자며, 세계적인 영성 필독서를 소개했다. 

 

성경에 나타난 묵상주의자들- 묵상주의 영성의 역할에 대한 최고의 설명 중 하나를 베냐민 지파에 대한 모세의 예언 겸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도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새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어깨 사이에 처하는 것’이야말로 묵상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누리기 원하며, 갈수록 더 깊은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감정없이 순종하는 종보다는 다른 모든 인연을 불살라 버릴 만큼 강하고 뜨거운 사랑을 구하신다. 묵상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준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과 그 택하신 백성 간의 사랑의 관계가 나온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 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속량하셨나니.

 

특히 다윗이 쓴 시편 63편의 중심구절을 들어보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 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신명기 6장 5절을 통해 신앙 공동체에 주어진 본분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솔직하고 부끄럼 모르는 사랑에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닿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차갑고 계산적인, 말 뿐인 신앙은 우리 하나님께 족하지 않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찌나 강한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가 종종 간음의 배반에 비유될 정도다. 예레미야에 보면 하나님은 한 때 이스라엘과 누렸던 사랑의 관계를 애틋하게 회상하신다. “네 소년 때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한때 나는 기독교의 핵심은 순종이며, 내가 천국에 가게 될 것이냐 지옥에 가게 될 것이냐가 궁극적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자라면서 나는 기독교의 핵심은 하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이며, 순종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살 때 필연적으로 걷는 길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나는 천국과 지옥을 장소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연합 또는 분리에 대한 묘사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은유적 표현이다. 이런 관계적 의미와 별도로 천국과 지옥은 공히 문자적으로 따로 실존하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신앙의 역사를 보면 선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라는 소명과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신앙을 ‘하라, 하지 마라’의 윤리 목록으로 전환시키곤 했다. 사모하는 마음 없는 이런 기계적 순종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신앙이 아니다. 한 여자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쏟다 붓자 일부 제자들이 격렬히 반대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를 열납될 사랑의 제사로 변호해 주신다. 사모하는 마음과 사랑이 가득한 그 행위가 예수님의 눈에 어찌나 아름답게 보였던지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온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묵상주의 영성이 남들의 오해와 판단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섬기느라 바빴던 마르다는 책망을 들었다. 섬김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묵상주의 영성의 마리아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주의를 흩뜨려 당신의 얼굴을 사랑으로 응시하는 사명에서 벗어나게 하실 마음이 없었다.

 

행동주의 영성은 묵상주의 영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전통주의 영성은 묵상주의 영성을 얄팍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성주의자에게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신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열정주의자에게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소중하고 값진 것이며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묵상주의자들이 역사적 역할을 잠시 살펴보면 이 영적기질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능동적 묵상’과 ‘주입된 묵상’은 서로 구별되어 왔다. 능동적 묵상이란 그리스도인 쪽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다. 반면 주입된 묵상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해지는 것에 더 가깝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참된 체험은 어떤 의미에서 ‘주입된’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나 그 협력의 의향과 능력도 실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숙한 묵상은 성령의 사역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이 사랑을 주입해 주셔야만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묵상은 묵상하는 자가 세상에 속한 정도 만큼 제한된다고 했다. 우리는 억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길을 닦을 수는 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묵상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갈망이다.

 

기독교 영성을 공부해 보면 사실 참된 묵상이란 시작과 끝이 있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통과해 지나가는 체험이다. 즉 묵상은 일반적으로 삶의 상태-인간이 그 안에 실존하는-로 간주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묵상 행위를 ‘불변이 하나님을 지각하는 것’으로 보고 거기에 내면의 놀라운 기쁨이 수반된다고 했다. 묵상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외적인 것들을 멸시하고 내적인 것들로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짧은 깨달음의 순간이 지나면 영혼은 그 연약함의 짐에 짓눌려 다시 평소의 수준과 정상적 체험으로 가라앉는다. 다른 세계로부터의 이 귀환은 서글픈 일이며 그래서 영혼은 다시금 그 체험을 갈망한다. 묵상행위의 찰나적 특성에 대한 모든 신비가들의 간증을 강조해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독교의 묵상이란 신비 체험보다는 사모하는 마음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영적 생활이란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가장 큰 계명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는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종은 ‘행위’ 언어인 반면에 친구는 ‘존재’ 언어다. 종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요리, 청소 등 많다. 그러나 친구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존재다. 종은 마르다고 친구는 마리아다.

나는 묵상을 ‘손을 마주잡은 기도’의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상태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쉰다.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그 사랑이 자신에게 가져다 주는 유익과 행복을 사실상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묵상주의자들은 이 사랑을 위해 산다.

 

묵상주의 영성의 행위

A. 예수님 기도

역사적으로 묵상주의자들은 ‘예수님 기도’를 애용했다. 예수님 기도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아주 간단한 기도다. 때로 그보다 짤막한 형태가 사용될 수도 있다. 5세기 유명한 수사 캐시안(Cassian)은 “하나님, 도와주소서. 속히 저를 도와주소서”라는 기도를 사용했다.

예수님 기도의 취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데 있으며 그 유용성은 역사를 통해 입증되어 왔다. 불안하거나 (예컨대 중요한 강연이나 설교를 앞두고) 두렵거나 긴장되거나 영적으로 메마르거나 유혹을 느낄 때 예수님 기도는 나로 하여금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해준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정말 도움이 됨을 발견했다. 올바른 기도의 모든 요소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겸손히 그분의 도움과 자비를 구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가장 순전한 형태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기도는 예수께서 주님이시고 나는 죄인이며 따라서 그분의 자비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는 장치다.

 

B. 은밀한 헌신의 행위

은밀한 헌신의 행위란 혜택을 입는 당사자를 포함 아무에게도 내 정체를 알리지 않고 몰래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무명으로 선물을 줄 수도 있고 누군가를 ‘막후에서’ 도와줄 수도 있고 카드를 보낼 수도 있다.

은밀함은 내 행위에 오직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는 증거다. 은밀함의 중요성이 거기에 있다. 모든 친밀한 관계에는 비밀이 있다. 남편과 아내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둘만의 비밀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그리고 로맨스-에서도 그분과 나 둘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은 친밀함의 일면이다. 하나님 쪽의 비밀이란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 주셨거나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을 우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우리 쪽의 비밀이란 내가 아무도 모르게 행한 섬김일 수 있다.

 

은밀한 헌신의 행위를 몇 가지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 궁핍한 사람에게 익명으로 돈을 전한다.

- 하나님께 시나 편지를 쓴 뒤 태운다.

- 하나님 앞에서만 노래를 부른다.

- 하나님의 임재 안에 ‘은밀히’ 걷거나 밤을 밝힌다.

- 은밀한 헌신의 장소를 정해 자주 가서 하나님을 만난다.

- 집중적으로 중보기도하며 금식한다.

- 내 가장 중요한 필요들이 하나님 안에서 채워진다는 표시로

뭔가를 영구적으로, 또는 일정 기간 동안 포기하기로 서원한다.

-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상징물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목걸이로 걸거나 반지로 끼고 다닌다.

- 실직자의 취직을 돕고자 ‘막후에서’ 노력한다.

- 목사나 친구에게 익명으로 격려의 편지를 보낸다.

- 창조주 하나님을 기리며 화단에 나무를 심거나 꽃씨를 뿌린다.

 

C. 춤추는 기도

전통적으로 사교춤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리드를 맡기는 것처럼 우리도 기도의 리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춤추는 기도란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기도다. 춤추는 기도의 중요한 요소는,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이 앞서가실 수 있도록 훌륭한 댄서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꾸려면 그분의 음성을 듣는 법과 그분의 관심사를 취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분의 시각을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 자리에 앉아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이미지를 떠올려라. 그리고 기도의 리드를 성령께 맡겨라.

 

D. 집중 기도

일반적으로 집중 기도의 원리는 이렇다. 우선 묵상기도의 초점으로 삼을 단어(예를 들면, 예수님, 아버지)를 택한다. 정해진 시간 동안(예를 들면 20분) 속으로 조용히 그 단어를 반복한다. 마음 속에 그 단어가 저절로, 즉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무의식중에 되풀이될 때까지 그렇게 한다. 마음에 예수님, 아버지, 기타 해당 주제(사랑, 기쁨, 평안 등)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면 외부의 산만한 것들이 차단된다.

 

집중 기도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묵상행위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쉴 뿐이다. 일부 기독교 전통에서 보기에 우리의 불안하고 장황한 기도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만 산만하게 할 수 있다. 6세기 말 7세기 초의 존 클리마커스(John Climacus)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당신의 기도의 말에 박식한 미사여구가 없게 하라 ··· 장황한 연설로 들어가지 말라. 달변을 애쓰다 마음만 기진할 뿐이다. 세리의 한 마디 말이 하나님의 자비에 가 닿았다. 믿음이 충만한 한 마디 고백이 선한 강도를 구원했다. 기도할 때 말이 많으면 오히려 마음에 영상이 들끓어 산만해지기 쉽다. 반면 단 한 마디 말은 마음을 평온케 한다.” 집중기도의 취지는 감정을 유발하거나 ‘영적 체험’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의 복된 임재를 누리며 그 안에 쉬는데 있다. 가장 깊은 차원의 사랑은 종종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말이나 행동 없이 상대의 존재 앞에 쉴 수 있는 사랑이다.

 

E. 마음의 기도

서구인들은 ‘기도’하면 대부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기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의 기도는 머리의 기도를 대치하지는 않지만 충만한 기도 생활의 필수 요소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적인 또는 머리의 기능 이상의 존재로 지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존재의 정서적 요소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 한 자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 머리의 기능만 개입된다면 우리는 절대 참된 평안과 충만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이성적, 인지적 교육은 절대 강세지만 그에 비해 우리가 정서발달을 위해 받는 교육은 거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성인들의 정서적 차원은 유치하거나 야만인의 태도에 가까울 만큼 조야할 때가 많다.”

 

믿음이 감정에 지배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감정이 무관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감정을 지으신 것은 다 뜻이 있어서다. 감정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감정을 완전히 무시할 경우 내 참 자아의 일부가 차단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마음의 기도란 행위의 기도가 아니라 존재의 기도다.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갈수록 더 많이 소유하시도록 우리 마음을 넓히는 것이다.

 

F. 십자가 길의 14처소

십자가 길의 14처소를 기억하는 것은 역사상 애용되어온 묵상 방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둘러싼 여러 사건을 더듬으며 기도하는 것이다. 대개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어 차례로,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넘어지신 예수님,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진 시몬, 두 번째로 넘어지신 예수님, 예수님을 위해 오는 여자들, 다시 넘어지신 예수님, 옷 벗김을 당한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 요한과 마리아를 부르시는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내려지신 예수님, 무덤에 안치된 예수님 등으로 이어진다.

 

각 지점마다 잠시 멈춰 마음속에 성경의 진리를 그려보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종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각 처소별로 정해진 기도문이 없으므로 기도를 성령의 인도에 맡기면 된다. 골고다 길을 더듬으며 기도하노라면 자연스런 통찰과 간구를 잃지 않으면서도 묵상기도에 구체적 틀이 생긴다.

 

G. 묵상 기도

로욜라의 이냐시오「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을 통해 묵상 기도의 대중화에 일조했다. 이냐시오는 성경 본문을 놓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 특정 주제를 놓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 어떤 물체(보거나 만지거나 듣거나 냄새맡을 수 있는 것)를 기도에 활용하는 것, 물체의 실제적 교훈을 묵상하는 것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번 기도는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를 굴복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진정한 인격적 만남을 갖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묵상주의 영성의 유혹

 

A. 균형상실

묵상주의자들은 간혹 성속(聖俗)의 이분법에 빠지는 우를 범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사람이든 물체든-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배제되는 것이다.

건강한 묵상주의자들은 고독 속의 친밀한 기도 못지 않게 풍성한 인간 관계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길임을 이해한다. 좋은 음악, 아름다운 자연, 예술, 여가에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작은 축제가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피조 세계의 경이를 음미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릎꿇고 기도할 때 못지 않게 동료 신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을 계시할 수 있다.

 

B. 자아의 흡수

정통 기독교의 범주를 벗어나는 묵상의 형태들이 있으므로 묵상주의자들은 조심해야 하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지 않고 인간의 자아가 하나님께 흡수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묵상을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비워 진공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묵상을 조심하라.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것은 속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갔으나 그 속이 비어 다시 더 많은 귀신이 들어와 사태가 처음보다 악화됐다고 말씀하셨다.

 

C. 덕을 잊음

묵상주의자들은 미숙한 심취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훈련과 절제를 통합하는 쪽으로 자라야 한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반한 상태를 벗어나 자기 희생에 기초한 헌신으로 깊어져야 하는 것처럼 묵상주의자들도 단순한 묵상을 벗어나 우리 뜻을 조정해 그리스도께 맞춰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D. 영적 체험에 중독되는 것

하나님 대신 감정을 구하는 ‘영적탐식’도 조심해야 한다.

 

▶사진 설명 2 청주온누리교회 이성용 목사. 케리토마스의 영성 이해는 다양한 리더쉽으로 이끌어가는 사회속에서 이 시대를 열어가는 최고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 ㈜한국미디어그룹 회장 말씀중에서

 

 

이성용 기자 sylee57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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