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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동북경제 심각성, 누가 원흉인가? 동북경제 쇠락의 역사

  • 등록 2016.06.13 20: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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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경제 쇠락
 
동북경제의 좀비화(僵尸化) 심각성이 충격적이다.
더구나 중앙이 이미 다년간 진흥에 전력한 배경에서도 여전히 좀비화가 심각하다.
근원적으로 동북 쇠퇴 원인을 정리해 보면 이 문제는 동북에만 관련될 뿐만 아니라 중국이 중등 수입 함정을 넘기 여부 그리고 1840년부터 시작된 역사적 대 전환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와 관계된다.
만일 자원 풍부정도, 산업의 견실성과 완전성, 시작의 높이를 보면 전국적으로 그 어느 지구도 동북과 비할 수 없다.
그러나 동북의 곤경은 지금 가장 선명하다.
최근 몇 년 중국 각성 GDP 성장률 랭킹 최후 마지막 자리는 언제나 헤이, 지, 랴오(黑吉辽) 3성의 몫이었다.
지난해 첫 자리는 랴오닝(辽宁)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거꾸로 센 결과였다. 최신 출범의 1분기 GDP숫자는 더구나 험악하다. 최후 5위의 성들로는 헤이이랴오(黑吉辽)에 산시와 허베이(山西河北)가 곁들어졌다. 그 중 랴오닝성은 심지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이 출현해 전국적으로 유일한 성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을까? 동북은 어떻게 쇠락해졌는가? 올해 이래 인터넷에서 이미 많은 토론이 전개됐다.
동북경제를 똑바로 보려면 거시적 역사 시야가 필요하다. 중국 경제판도는 스펙트럼과 같아 최북쪽의 홍색극(红色极)으로부터 점차 최남단의 남색극(蓝色极)으로 과도한다.
소위 홍색극-홍색계는 북방 소련식 경제모식의 영향구, 복사구이고 소위 남색극-남색계는 남방 영국식 경제모식의 영향구이며 복사구이다. 남색구의 기지는 만청시기(晚清时期)의 광저우(广州), 개혁개방후의 홍콩이다.
중간의 창쟝 삼각 일대는 두 가지 모식의 혼합체이다.
동북이 홍색극으로 되기 전에는 사실상 일본이 통제했는데 상상외로 사상 전례 없는 경제의 휘황찬란 시기를 형성했다.
여기에는 경제발전의 유전자 코드가 함유되어 있다.
동북에서 일찍 출현한 휘황찬란한 성적도 마찬가지로 놀랍다.
일본이 투항하던 1945년 전 중국 공업 총생산치 중 동북이 85%, 타이완이 10%, 베이징, 상하이, 텐진, 광저우, 우한, 난징, 충칭(北京上海天津广州武汉南京重庆)등 모든 지역을 포함한 중국의 기타 부분은 전부 합쳐도 근근이 5%에 불과했다.
지난세기 30년대 남만 철로의 신경(新京)부터 다롄(大连)까지 구간을 운행하는 아시아 호 특별급행열차가 이미 전체 밀봉식 에어컨 차량으로 발돋움했다.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동북의 1949년 이전 역사에 관련해 근근이 봉계군벌의 민중압박과 위만주국의 14년 역사는 일본이 동북 민중을 노역한 내용뿐이고 당시 동북의 공업상황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취샤오판(曲晓范)의 ‘근대 동북도시의 역사적 변천(近代东北城市的历史变迁)’-동북사범대 출판사 2001-이 출판된 후에야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난 듯이 옛 시절의 동북의 기세와 패기에 크게 놀랐다.
오늘의 동북인구의 유출과 반대로 당시 동북은 인구가 급증했다.
1936년 1월 전 동북 인구가 3097만이었는데 연말에는 3701만으로 급증, 1941년에는 4229만에 도달했다. 이로부터 지난세기 세계 최대의 이민조류를 형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위 관동진출(闯关东)이었다.
수천수만의 관내 민중들이 생명 위험을 무릅쓰고 겹겹의 장애를 돌파하면서 동북에 이전했다. 이 행동은 현재 동북인구 유실과 선명한 대조로 됐다.
하나의 상식은 정치 요인 등 정신적 차원의 원인을 제쳐놓고 보통 민중들의 이전 행동의 주요 원인은 목적지의 부유함이다.
현재 동북 인들이 모두 베이징, 상하이와 광저우(北上广)으로 이전하는 것과 한 가지 도리이다. 많은 중국인들이 생명 위험을 무릅쓰고 밀항방식으로 미국과 유럽으로 가면 갔지 모험하면서 르완다와 짐바브웨에는 간다는 뉴스는 하나도 없다.
1945년 동북 공업규모는 일본 본토를 초과하여 아시아 제1로 됐다.
중국 중앙TV의 최신 프로‘탐색과 발견’ 칼럼은 ‘선양:1949’중 이렇게 소개했다.
“일본과 독일이 패배한 후 동북이라는 이 지구가 미국, 소련, 영국을 이어 글로벌 제4대 공업구로 됐다.”
선양부터 다롄까지의 선다철도선(沈大线)양측에는 공장 굴뚝이 수림을 이루고 도시들이 하나로 이어졌으며 세계에 유명한 ‘동북공업구’를 형성하고 선양 테시구(沈阳铁西区)는 ‘동방 루르’라는 명성을 취득했다.
1931년 동북공업 총 생산치는 공농업 총생산치의 59.3%를 차지했다. 그런데 새 중국 건국 50여년 후의 2003년 이 비율이 겨우 57.5%에 도달했다.
1943년 동북이 전중국의 88% 생철, 93% 강철, 93.3% 전력, 95% 기계를 생산해 거대한 특수강철이라는 당시 세계 선두 첨단 과학기술 기업을 형성했다.
20세기 30년대 창춘(长春)은 아시아에서 제일 처음 수세식 변기를 전면적으로 보급한 도시로, 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도시 가스를 전면적으로 보급한 도시로 됐으며 중국에서 첫 번째로 지하철과 도시 환선고속도로를 계획한 도시로 됐다.
그리고 주요 거리의 조명과 전신 노선은 모두 지하 파이프라인을 채용했으며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주간도 전선 지하시스템을 실현한 도시였다.
결과 동북을 가진 자가 천하를 가지게 됐다. 그리하여 마오쩌둥(毛泽东)은 당시 “천하를 얻으려면 일체 대가를 아끼지 말고 동북을 탈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만일 관내를 취득하지 못하면 우선 창춘을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의 창춘(신경)과 동북 발전 추진 야심은 한 방면은 전쟁이 거대한 공업 기지로 군사공급을 보장하는 수요와 다른 한 방면 신경을 신교토(新京都)로 발전하게 하려는 행동은 50년후 일본 수도를 도쿄로부터 신경에 이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중국인들에게 다른 한 측면의 관찰입각점 즉 일본인들의 동북 발전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배우는데 능한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维新)시절부터 스스로 똑똑한 체 하면서 ‘일학을 체제로 하고 서학을 일본에 이용하는(日学为体西学为用)’ 따위의 물건을 실시하지 않고 자기들의 낙후를 솔직하게 승인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배우면서 들보를 훔쳐 기둥을 바꾸지도 않고 새로운 병에 낡은 술을 담지도 않았다.
그들은 정치에서는 헌정을 하면서 군주입헌을 실시하고 경제에서는 영국의 시장경제를 배우면서 점차 강대해졌다. 혹시 일본인들이 선천적으로 총명하지 못한 탓인지 그들은 종래로 원천적 창조를 하지 않고 일본의 경제모식을 절반은 영국에 절반은 독일식으로 정했다.
동북경제가 가장 찬란하던 연대 경제관리 기본 사고맥락이 바로 이것이었다.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동북을 상실한후 동북이 소련군대의 손에 들어갔으며 물자가 깡그리 약탈을 당했다. 그래도 밑천은 여전히 충실해 새중국 건국후 여전히 ‘맡아들’이였으며 더구나 지리적 편리를 합쳐 동북은 우선적으로 소련의 원조 중점지구로 되고 홍색극점으로 됐다.
개혁개방 후 남방 사기업 굴기에 따라 동북의 쇠락상이 즉각 폭로됐다. 당년 워싱턴과 비기던 창춘, 당년에 파리와 자매결연을 한 하얼빈, 세계에 이름난 공업지대-동방의 루르-선양 및 완전히 독일 사람들이 설계한 다롄이 몇 십 년 후의 오늘날 국내 2,3선 도시로 전락했다.
소련의 경제모식은 보건대 기세높고 활기차지만 그의 본질은 기필코 경제운행의 좀비화를 초래하게 마련이었다.
건국후 동북이 소련의 그림자와도 같이 숫자차원 성장을 제외하고 품질은 갈수록 저열해졌다. 현재 동북을 언급하면 사람들은 흔히 파탄되고 퇴락한 중공업과 무리를 이룬 실직노동자들을 말하게 된다.
경제체제의 경직화가 보수적인 관념을 형성하면서 공동으로 지금의 동북 곤경을 초래했다.
현재 동북의 기분은 여전히 계획경제로 뒤덮여 있다. 그 전형은 바로 국유기업이 차지한 비율이 매우 높은 점이다.
동북지구 국유 기업 자산이 차지한 비율은 50%를 초과하는 반면에 기타 지구의 평균치는 38%이다. 국유기업의 저열한 효율과 높은 적자와 결손이 도처에 표현되지만 동북지구가 특히 엄중하다.
동북 지구에서 2014년 국유기업 결손률은 32.4%에 달했다. 그러나 기타 지구 국유 기업 결손 비율은 26.2%였다.
그리고 또 ‘전형수립’ 사례로부터 동북의 사고방식과 민중들의 관념을 볼 수 있다. 동북이 수립한 영웅전형이 적지 않다.
왕진시(王进喜) 석유 노동자는 애국 때문에 중국에 석유가 있다고 굳게 믿은 나머지 못에 뛰어 들어가 신체를 교반기로 삼아 작업했다. 이런 방식만으로 석유 산업을 잘 경영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최근연간 동북에서는 또 궈씨(姓郭) 모범-랴오닝성 안산시(辽宁省鞍山市)의 궈밍이(郭明义)가 출현했다. 자칭 바보라는 ‘선진형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홍콩, 선쩐에서나 혹은 뉴욕과 런던 그리고 양쯔강 지구에서도 모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농촌-화시촌(华西村)이 인기가 그렇게 높아도 그들은 시장경제와 공공자원 결합식을 채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환경에 처한 관리들과 민중들이 시장경제의 본질과 운행법칙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민중관념은 야루강(鸭绿江) 건너편의 북한 동지들만이 초과할 수 있다.
2003년 10월 중공중앙, 국무원이 ‘동북지구 등 노공업기지 진흥전략에 관련한 약간의 의견’을 발포했다.
13년후 2016년 4월 26일 중앙은 또 ‘동북지구 등 노공업기지 진흥에 관련한 약간의 의견’을 발급했다. 중앙의 지지강도는 높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상술한 의견들은 빠진 내용이 하나도 없다. 총체적으로 보면 대체로 계속 수혈해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새로운 동북 진흥계획은 3년 내에 1.6조 위안을 투자한다는 등이다.
그러나 수혈로 문제를 해결할 있을까?
강대하던 동북이 오늘 이 꼴이 된 것은 동북인들의 뺨만 친 것이 아니다. 사실 만일 사고방식이 불변하고 방식과 방법이 불변하면 이러한 돈은 모두 물거품이 되지 않더라도 그 효과는 상상할 만하다.
동북의 문제는 계통적이며 근본적이며 전략적이다. 뼈를 깎는 결심이 없으면 동북이 진흙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소수의 몇 명 간부 교체로는 아무 문제도 풀 수 없다. 올해 낙마한 랴오닝 성위서기(辽宁省委书记)-왕민(王珉)은 일찍 발달한 수저우(苏州)에서 여러 해 지도자 직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동북의 곤경을 개변하지 못했다.
동북 진흥은 사실 남방에서 이미 실천해 본 일로서 어렵지도 않다. 이론적으로는 동북에서 완전히 재차 출연할 수 있다.
동북이 곤경에 처했을 때 남방의 선쩐(深圳)은 여러 산업들이 생기발랄하게 전개되면서 세계의 선두에 서고 있었다.
동북문제의 근본은 여전히 정부가 일체를 관할하고 시장이 역할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 체제 매듭을 풀지 못하면 그 다음의 일체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위기사에 대한 법적 문제는 길림신문 취재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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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연합 온라인뉴스팀 (김은미) 길림신문 기자 hidail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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