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액에는 ‘현령소덕의열 무안 성제묘(显灵昭德义烈武安圣帝庙)’라고 씌어져
한국에는 ‘삼국’을 읽지 않는 사람과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삼국연의’가 한국에서 큰 환영을 받는데 그 중 관우의 형상이 인심에 심입하고 있다. 한국인은 관공을 무한한 위력을 가진 장군신으로 신봉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적지 않는 지방들에 모두 관공묘가 있다. 한국인의 삼국 감정이 곳곳마다 체현되고 있으며 생활중에서 한국속담을 인용하기를 즐기며 기업과 학교도 애용하고 있다.
서울 관공묘는 국보
한국 서울동대문 밖 멀지않는 곳 동묘앞이라는 지하철역이 있는데 명칭이 주목을 끌지 못하지만 이곳에서 공양하는 인물이 바로 중국인들이 모두 잘 아는 대영웅, 삼국명장 관우(关羽)이다.
1592년 일본 봉건영주 도요토미 히데요시(丰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할때 명조가 항일원조의 만력 조선전쟁을 발기하여 일본 침략자를 한반도에서 쫓아냈다.
소설 ‘임진록’에 따르면 당시 수도에서 도망한 조선 선조 이연(李昖)이 꿈에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원조의 손을 내놓는 것을 봤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온 명군들이 모두 관공을 신앙하여 관공이 조선의 수호신으로 됐다. 그리하여 왜란을 평정한후 조선이 각지에서 관제묘를 설립했다. 한양성의 동서남북에 모두 관제묘 하나씩 있게 됐는데 그중 현존 최대규모가 바로 1601년에 창설한 관제묘이다.
이 관제묘는 현재 동묘공원으로 총 면적이 9300 ㎡이며 1963년 한국 국보 142호로 정해졌다.
원내 고목이 하늘을 찌르고 정문앞에는 ‘대소관원 모두 하마(大小人员皆下马)’,’잡인금지(禁杂人)’라는 한자 석비가 세워져 있다. 두번째 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정전이 눈에 들어온다.
편액에는 ‘현령소덩의열 무안 성제묘(显灵昭德义烈武安圣帝庙)’라고 씌어져 있다. 정전안에는 검은 수염이 앞 가슴에 내린 관공 금신상을 공양하고 양측에는 관평(关平), 주창(周仓) 등이 시중들고 있으며 대전 양켠에는 또 명대부터 지금까지 보류한 대도와 군고가 진열되어 있다. 전내에는 ‘천추의기(千秋义气)’,’만고충심(万古忠心)’라는 편액이 있고 동서 무전에는 역대 조선국왕이 관우를 찬송하는 비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동측은 사도세자와 조선 정조가 쓴 무안왕묘비이고 서쪽은 조선 숙종과 영조가 쓴 대한충절 무안왕 찬양명(大汉朝忠节武安王赞扬铭)이다.
4명의 임금님이 쓴 비석으로 보아 조선에서의 관우의 지위를 알아볼수 있다.
관우의 이름하에 토지도 있어
관우의 충의천추와 명조의 조선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때문에 명조가 멸망된후에도 관공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조선 당국의 ‘사명(思明)’ 감정에 따라 더욱 흥성해지고 각지에서 설립하는 관제묘도 더욱 많아졌으며 관공 신앙도 한국의 전통신앙에 진입했다.
한국 신종교밀집(新宗教密集)이 출현한 19세기말 20세기초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관공 신앙에 인해 관성교를 창설했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관우 탄신은 5월 13일인데 단오제가 한국에서 또 신령 강림의 날이므로 이 두 명절이 점차 하나로 결합되어 매년 5월초 단오의 날 적지 않는 한국인들이 관우제사를 지낸다.
2015년 단오제때 중국 기자가 한국에서 이 장면을 보게 됐다. 이날 오전 중년 노인들이 동묘 대전에 찾아와 과일, 육식, 떡과 술을 진열하고 절을 했다. 한 노인은 관공이 한국의 대장군을 보우하는데 매우 영험하다며 그러므로 그녀는 매년마다 제사를 지내고 평안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한국인들로 말하면 관우가 여전히 삼국연의 소설중 사람들이 존경하게 하는 충의화신이다. 각종 관우 연구 저술과 관우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과 만화가 환영을 받는다. 한 매체는 한국 충청북도에 관우 이름에 속한 ‘토지’가 있으며 관우, 제갈량, 장비 등 삼국 명인을 모시는 사당도 설립하고 제사를 전문 지내는 사람도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상 많은 한국인들이 모두 ‘삼국팬’이다. 관제묘 외 서울의 저명한 명소 남산에는 또 제갈량을 공양하는 ‘와룡묘(卧龙庙)’가 있다.
‘유비가 관공을 믿는 것처럼’
한국인들이 ‘삼국연의’중의 인물에 대해 각종 평가를 한다. 같지않는 인물 형상 및 이야기가 많은 한국인 일상생활 속담을 출현시켰다. 예를 들면 ‘여포의 방천화극처럼(像吕布的方天画戟)’은 매우 예리한 물건을 비유하며 ‘항우가 고집으로 멸망, 조조가 소총명으로 패배’는 너무 고집을 쓰는 사람과 잔꾀를 쓰는 사람을 경계하는 의미이다.
‘유비가 관공을 믿듯이’는 한 사람을 지극히 믿는 사람을 의미하며 그를 의심하려 하지 않는 것을 비유한다.
‘장비의 명령과 같이’는 갑자기 예측 불가의 사건을 만남을 비유하고 ‘유비처럼 운다’는 항상 우는 사람을 비유한다.
‘삼국연의’를 제재로 한 만화영화 인형극외 ‘삼국연의’ 인물 혹은 줄거리와 관련되는 전자 게임 소프트웨어도 수천수만가지이다. 한국의 사관학교, 대학굥와 각종 기업들이 이미 ‘삼국연의’를 군사 전술, 기업관리와 전략 등 영역에 운용한다.
한국 현대 자동차회사는 ‘자동차 경영 지침’을 발표했는데 이 수첩은 제갈량, 관우와 조조를 우수한 경영인물로 취급하고 있다. 제갈량의 공과 사의 분명, 관우의 충성심, 조조의 인재 신임 등을 강조하고 있다.
韩国有句话,叫“不要和没读过‘三国’的人说话”。《三国演义》在韩国非常受欢迎,其中关羽的形象更是深入人心。关公被韩国人奉为威力无边的将军神。直到现在,韩国不少地方都有关公庙。韩国人的三国情结体现在方方面面,不仅生活中爱用三国谚语,就连企业学校也将其为我所用。
首尔关公庙是国宝
在韩国首尔东大门外不远处有一个叫做东庙前的地铁站,名称虽然不起眼,但这里供奉的却是一位在中国尽人皆知的大英雄、三国名将关羽。1592年,日本封建领主丰臣秀吉发兵侵略朝鲜,明朝发起了抗日援朝的万历朝鲜战争,将日本侵略者赶出朝鲜半岛。根据小说《壬辰录》,当时逃离首都的朝鲜宣祖李昖曾梦到有神人从天而降施以援手,而入朝的明军大都信仰关公,关公成了朝鲜的守护神。因此在倭乱平息之后,朝鲜在各地建立关帝庙。在汉阳(今首尔)城的东西南北各有一座关帝庙,其中现存规模最大的就是这座始建于1601年的东关帝庙。
这座关帝庙现在是东庙公园,总面积约9300平方米,1963年被定为韩国国宝142号。园内古木参天,正门前立着“大小人员皆下马”“禁杂人”的汉字石碑,进入二道门,宏伟的正殿映入眼帘,匾额上书“显灵昭德义烈武安圣帝庙”。正殿内供奉着黑色长髯散满前胸的关公金身像,两侧有关平、周仓等陪侍,大殿两旁还陈列着明代保留至今的大刀和军鼓。殿内有牌匾“千秋义气”“万古忠心”,东西庑殿内立有历代朝鲜国王赞颂关羽的碑刻,东侧是思悼世子和朝鲜正祖书写的武安王庙碑,西侧是朝鲜肃宗和英祖书写的大汉朝忠节武安王赞扬铭。四位国君书写碑刻,可见关羽在朝鲜地位之尊崇。
关羽名下还有块地
由于关羽的忠义千秋和明朝对朝鲜的“再造之恩”,即使明朝灭亡之后,关公信仰也没有消亡,反而在朝鲜官方的“思明”情结下愈发兴盛,各地兴建的关帝庙也越来越多,关公信仰也进入韩国的传统信仰中。在韩国新宗教密集出现的19世纪末20世纪初,韩国有人还因为信关公创立了关圣教。
民间传说关羽诞辰是五月十三,而端午节在韩国又是神灵降临的日子,因此两个节日逐渐合在了一起,在每年五月初五端午当天,不少韩国人前来祭拜关羽。2015年端午节,笔者在韩国时曾看到这一场景,当天上午就陆陆续续有一些中老人来到东庙大殿前摆上水果、肉食、打糕和酒,然后跪拜。一位老人对笔者说,关公是保佑了韩国的大将军,十分灵验,所以她每年都来祭拜,祈求平安。
对韩国人来说,关羽仍是三国演义小说中那个令人敬仰的忠义化身,各种研究关羽的著述以及以关羽为主角的小说和漫画十分受欢迎。曾有媒体报道,韩国忠清北道有一块关羽名下的“土地”,建有供奉关羽、诸葛亮、张飞等三国名人的祠堂,还有人专门祭祀。事实上,很多韩国人都是“三国迷”。除了关帝庙,首尔著名景点南山上还有供奉诸葛亮的“卧龙庙”。
“好像刘备相信关公”
韩国人对《三国演义》里的人物有各种各样评价。不同人物的形象及故事衍生出了很多韩国人日常生活谚语。比如“像吕布的方天画戟”,比喻东西非常锋利的样子;“项羽因固执灭亡,曹操因小聪明被打败”,指警戒太固执的人和耍小聪明的人;“好像刘备相信关公”,比喻极为相信某些人,不愿怀疑他;“如张飞的命令”,比喻突然遇到无法预测的事情;“像刘备一样哭”,指经常哭的人。
除了以《三国演义》为题材的动画片和木偶剧,跟《三国演义》人物或情节有关的电子游戏软件也成千上万。韩国的军校、大学以及各种企业就已将《三国演义》运用到军事战术、企业管理和战略等领域。韩国现代汽车出过一本《汽车经营指南》,该手册将诸葛亮、关羽和曹操奉为经营的优秀人物,因为诸葛亮公私分明;关羽忠诚度高;曹操知人善任。
/新华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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