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각 양꼬치’ 집 유경매 한국생활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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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각양꼬치’는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 155-8에 위치해 있다
내가 한국에 오게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미 한국에 와 있는 아버지가 뇌출혈로 일을 못하게 된 원인에서였다. 아버지께서는 2000년도에 브로커에게 거액을 돈을 들여 한국에 왔는데 수만위안의 빚을 지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현장 일을 하다가 뇌출혈이 와 더욱 어려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에는 보험 하나 가입한게 없는 상태에서 치료비가 엄청 들었는데 결국 이자돈을 꿔대면서 병원출입을 해야 했다.
병원에 입원한후에는 치료비가 더욱 엄청나 4000만원이란 돈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다른 경제내원이 없는 우리 집을 놓고 말하면 이는 천문수자와 같은 것이였다. 사실 한국에 온 목적은 잘 살려는 것이였지만 아버지의 병환으로 더욱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병구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한국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되었고, 갖은 노력끝에 2002년 마침내 한국땅을 밟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에 들어서자 나는 곧 일산의 한 갈비집을 찾아 서빙일을 하게 되었다. 매일 13시간이란 고된 일과를 보냈지만 아버지의 치료비를 장만해야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힘들지만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은 항상 즐거웠다. 한편 그보다도 더 힘들고 괴로울때가 있었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벌어 아버지의 병치료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체류기한을 넘겨 곤혹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일을 하는 도중 단속이 나오면 재빨리 가게 뒤에 가 숨어야 했던 것이다. 식당주인은 나의 상황을 알면서도 너그럽게 봐주면서 단속이 있을때면 어김없이 나를 빼돌려 주군 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주인은 아버지의 치료비를 위해 일하는 내가 하도 기특하여 감싸줬다고 했다.
그렇게 숨어다니기를 거듭하며 4년이라 시간이 지나자 하나의 기회가 찾아와 나는 비로소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권리를 찾게 되었다. 2006년 한국 법무부의 자진신고 정책이 아오자 나는 한시각도 지체하지 않고 신고한후 귀국하였다. 1년후 다시 한국에 입국할 때 그처럼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인젠 나도 오늘을 귀중히 여겨 이국타향 한국에서 나의 꿈을 실현해 가리라 다짐했다.
재입국후 나는 전에 단속을 피해 숨어다니던 때를 회억하며 하루 13시간씩 고된 일을 하기보다는 뭐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게 피부미용이다. 나는 철산의 한 미용소에 들어가 일하면서 열심히 맛사지도 우고 미용도 배웠다. 한단계 지난후 미용실 사장이 수준이 괜찮으니 계속 채용할 생각이나 이렇게 될 경우 반드시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 또한 H2 비자에서 F4 비자로 변경해야 할 상황이였기에 사장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거의 2달간이란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국가 시험을 거쳐 피부미용 자격증을 획득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때는 체류자격 불허로 쫓겨다니는 신세였지만 인젠 국가시험에 통과되어 당당하게 F4 비자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니 마음이 벅찼다. 그후 나는 피부미용실에서 4년동안이나 근무했었다.
그러던중 남편과 상론한후 자영을 시작하기로 하고 2016년 광명시 광명동의 한 골목에 ‘이향각 양꼬치’집을 오픈하게 되었다. 그간 한국에서 여러 식당 다니며 많이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신심이 있었다. 그런데 면적이 40평방도 넘다보니 자금이 부족해 망설였다. 허나 식당이 자리잡은 위치고 좋고 반드시 장사가 잘 될 것이라는 판단에 놓치고 싶지않았다. 역시 남편과 상로한후 중국에 있는 집을 비롯해 모든 재산을 팔아 자금을 만들어 투자하였다.
나는 두어달간 한 친척이 경영하고 있는 양꼬치집에 가 배우면서 나름의 경영방식을 모색하였다. 오픈후에는 여러 가지로 손님들을 끌기위한 작업을 펼쳤다. 나는 처음부터 한국에 있는 중국인 고객만을 위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하여 어떻게 하면 한국인 고객을 흡인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에 두가지 조치를 취했다. 우선 뼈를 갈라내는 작업인데 일손이 딸리고 시간이 들더라도 직접 손을 댔다. 이렇게 되면 한명의 일군을 더 써야한다. 이 작업이 잘 되는가 못되는가에 따라 양꼬치 질이 달라 지는 것이다. 다음은 사람에 따라 향신료를 적당하게 조절 하는 것이다. 향신료를 강하게 하거나 약하게 하는 것에 따라 비릿내를 제거하는데 효과적이고 맛이 틀리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요리도 한국인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식을 취했다. 처음 한계단은 한국인 고객이 오면 번마다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서비스로 올렸다. 그중에는 철판명란 볶음, 정장육슬, 개구리다리튀김, 돼지장족 등이 있는데 과연 효과를 보아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메뉴로 되었다. 현재 ‘이향각’의 고객중 70%가 한국인 고객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
나의 고향은 흑룡강성 목단강 동녕시, 한국에 온지도 어언 15년이나 된다. 비록 큰 성공은 못했지만 나는 나의 힘으로 아버지의 병구환을 하였고 또 나의 창업으로 이국타향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는데서 자호를 느낀다.
나는 현재 식당이 자리잡고 있는 광명동에서 산지도 8년이나 된다. 요즈음 이곳에 조선족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많이 늘었다. 골목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식당, 여행사, 환전소 등 업체들이 기지부수다. 중국인 간판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중국문화의 향기도 여기저기에서 그윽히 풍겨온다. 대림, 남구로에 이어 중국인들의 집거지로 된 것이다.
광명동에 자리잡은 ‘이향각양꼬치’역시 그중의 일부분이다. ‘이향각’의 양꼬치향기는 금후에도 이 아담한 골목골목에 더욱 짙게, 그리고 더욱 오래도록 넘쳐나 오가는 고객들에게 행복을 안겨줄 줄 것이다.
대필/전춘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