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재미 방문요양센터’ 양덕자 센터장이 들려준 이야기
내가 한국에 온 계기는 중국에 있을 때 잘 나가단 선박회사가 부도나면서 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부터였다. 당시 나는 이 회사에 일반 직원으로 입사했는데 일을 잘해 경리급까지 승급했고, 한때는 남부럽지않는 삶을 누렸다. 그런데 뜻하지않게 직업을 잃고나니 살아가기가 막막했다. 내외가 모두 퇴직금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생각 끝에 결국 한국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국에 오는 길도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친척의 초청을 받아 비자를 낼려고 영사관에 서류를 들이밀면 번마다 거부를 당한 것이다. 그래도 오직 한국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빵구’가 나면 또 서류를 갖춰 교부하고 기다렸다. 여전히 좋은 결과 없이 안된다는 소식뿐이였다. 이렇게 하기를 4차, 남들은 모두 쉽게 가는데 무슨 영문일까? 나는 그 원인을 알아보고저 아예 심양 영사관에 찾아가 담당자를 찾아 문의했다. 담당자는 나를 초청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하더니 한참 지나서 친척가운데 불법체류자가 있기에 안된다고 알려주는 것이였다. 영문을 알고보니 실망뿐이였다. 인젠 한국 갈 꿈을 접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물론 한국에 가야만 살길이 생기는건 아니겠지만 한번 먹은 마음 고칠 수는 없었다. 마침 한국 비자와 관련하여 잘 아는 한 친구가 다음에는 불법체류하고 있는 친척과 관계없는 다른 한 친척을 찾으보라고 충고를 주기에 한번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과연 그 제안이 효험을 보아 칠촌벌이 되는 먼 친척의 초청으로 결국 2003년 10월에 무사히 입국비자를 받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항구도시 대련에서 한국행 배에 오르자 내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당시 한국에 갔단 사람들이 돈을 벌어 집을 사고 자식들을 시집장가 보내는 등 사실들을 많이 보아오던터라 나도 그들처럼 열심히 벌어 잘 살아보리라는 일념으로 불타올랐다. 배우의 란간에서 끝없이 넓디넓은 푸은 바다를 보면서 내 인생도 인젠 복과 운이 틀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기도 했다.
처음 집이 없어 어느 봉사단체에서 생활했다. 친척이거나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처음부터 내 힘으로 산다는 생각을 굳히였다. 숙사를 잡아놓은후 곧 경기도 안양의 한 꼼장어집에서 일했다. 하루 10시간씩 야간을 하고 새벽두시에야 끝나는데 주인이 자가용으로 집까지 바래주었다. 그런데 주인이 다른 일이 있을때면 택시비 5000원 주었는데 나를 놓고 말하면 큰 돈이였다. 당시 남편은 가목사에 있고 아들은 대련에서 공부하고 있는 상황이라 나는 돈을 벌어 이들에게 보내야 했다. 계산해보니 내 생활비와 가족에게 보내려면 적어도 130만원은 있어야 했다. 나는 단돈 일푼이라도 아껴야했다. 그 택시비 5000원을 절약하기 위해 택시를 타지않고 독산동까지 걸어왔다. 2시간 남짓한 거리다. 누가 여자몸으로 새벽 2시 한밤중에 무섭지않냐고 물은 일있는데 나라고 어찌 겁이 없으련만 오직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돈을 위해서라면 두려움이란게 없었다.
3달후 나는 봉사단체 숙소에서 나와 10만원 하는 집을 세맡았다. 고달픔을 달래기 위해서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시작하여 나는 4년간이나 안양을 다니면서 아껴 쓰고 아껴 먹으면서 돈을 모아 가족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힘은 들었지만 내 노력의 대가로 가정을 살렸다는 점에서 자부를 느꼈다.
그러던중 허리디스크가 오면서 번중한 일을 하기 어렵게 되었고 한동안은 한국생활에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한국에 온 사람치고 누구든 건강하기만 하면 부지런히 일해 먹고사는 문제 해결할 수 있지만 일단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모든게 끝장난다. 음식점 일을 못하게 되니 금후 어떻게 보내야 하는 생각으로 마음만 착잡했다. 그후 어느 한 뷔폐집에서 일을 좀 하기는 했지만 역시 며칠 견지못하고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중 어느 한 신문에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에 대한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강의를 받고 배우면 시험치지않고도 증서를 딸 수 있다고 했다.
광고를 접수한 이튿날부터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 한달만에 자격증을 취득했다. 물론 일을 하지않아 돈은 벌 수 없었지만 늦은 나이에 배워서 자격증을 얻었다는게 나로서도 대견스러웠다, 그보다도 방문요양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춰 할 일이 있어 더욱 감격했다. 이때부터 방문요양을 시작하게 되었고, 일거리가 없을때는 가벼운 알바를 뛰기도 했다. 손꼽아보니 이렇게 뛰어다닌 시간이 거의 7년이나 된다. 열심히 뛰어다닌 대가로 그간 아들애 공부 뒤바라지도 원만히 하고 남편도 한국에 와 함께 살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배운덕에 방문요양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데서 배움이란 얼마나 중요하고 즐거운 것인가를 뒤늦게나마 실감했다. 그후 나는 계속 공부를 견지해 2년 사이에 복지사자격증, 보육교사자격증, 산후조리자격증, 베이비시터자격증, 노인상담사자격증, 가사도우미자격증 등을 취득하였으며 2014년에는 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된 ‘새재미방문요양센타(이하 센타로 약칭)’를 설립해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현재 센타에는 20명의 방문용양 보호사들이 있어 수시로 방문하고 있다. 매일 서류작성과 사례관리는 물론 개인정보보호지침, 간염예방 및 관리지침, 응급상황 대응지침, 치매예방 및 곤리지침, 종사자 윤리 지침 등 직무교육을 한다고 눈코뜰새 없이 드바쁘다.
그 외 다사랑봉사대, 다사랑방범대, 다사랑무용단 등 다양한 단체를 마련해 수시로 지역사회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벌리고 있다. 합동순찰을 비롯해 어르신들을 위한 떡국행사, 청소봉사 활동, 문예공연 등은 많은 환영을 받고 있다. 봉사를 많이 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는데서 박원순 시장상, 국회의원상, 서울시경찰청장상, 경찰서장, 금천구민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해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한국에서 생활한지도 어언 10여년 세월, 비록 고생도 많았고 고달프기도 했지만 나름의 생활체험으로 사랑과 섬김 그리고 배려와 베품은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한 행복과 기쁨을 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삶의 방식이라는 이치를 깨쳤으니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전춘봉 기자 대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