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 소강석 목사는 듣기 쉬운 인문학적인 설교로 성도들에게 삶의 지혜와 용기를 갖게 했다.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는 코로나19 팬데믹, 위드코로나 속에서도 교회 성장은 멈추지 않았고, 이로 인해 교계에 특별한관심을 받아 왔다.
예수님의 설교를 보라. 공중을 바라보며,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라. 농사하지 않아도.. 한 마디로 쉬운 설교이다. 소강석 목사의 설교도 만찬가지로 쉬운설교이다.
오늘날 코로나 19위기 속에서도 성도들이 주일을 맞아 예배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 온다. 그럼 이러한 때 교회를 맡은 목사는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할까?
'바로 소강석 목사는 케리토마스의 저서 '영성에는 색깔이 있다'에 말하는 9가지 영성을 가지고 설교한다. 자연을 보면서, 성도들이 고통받는 현장을 보면서 느끼면서, 신학적인 방법으로, 예배 활성화를 위해 정부의 관계들과 협조 요청을 하면서, 비 대면 때는 각각 가정에서 모니터를 통해, 예배를 준비하여, 온 성도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며 여기까지 왔다.
또 이야기하면 돌 던질 사람들 있겠지만, 목사가 성도들이 힘들게 살다가 교회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는데, 목사가 폼잡고 뭐 하겠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무어라 하겠는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폼이나 잡고, 큰 소리나 치려 하는가?
적어도 성도들이 힘을 얻도록 광대도 되어 보고, 가수도 되고, 사회 복지사도 되고, 적어도 성경 말씀을 입체적으로 온몸으로 전하는 그런 설교를 해 보아야 되는 것 아닌지요? 그러면서 성도들이 다 알아 들어갈 때에 성경 말씀 한 구절 소개하면서 정리할 때. 아! 예수님이 그래셨구나! 감동하며 돌아 갈것 아닌가?
매일 유튜브로, 남의 설교를 비판하는 분들! 이분들이 설교학 교수님도 아니고, 아! 가슴 아프다. 뭐 할 일이 그렇게 없어서 그런 것 가지고 방송 하는지요?
제가 책 하나 소개합니다. 케리토마스의 『영성에는 색깔이 있다』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이끄는 9가지 영적 기질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교인들에게 기도하는 방법도 하나. 예배 방법도 하나. 성경 공부하는 방법도 하나. 설교 방법도 하나라 가르쳐 왔다. 오래전에는 복음 성가만 불러도 큰일 난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귀납적인 설교, 연역적인 설교. 한 주제로 전하는 원포인트 설교. 3대지 설교. 본문 접목식 설교. 강해설교. 이야기식 설교. 다양한 설교로 발전해 왔다.
최근에는 인문학적인 설교. 코칭설교 다양한 설교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한다.
구원의 길은 분명 당연히 하나이다.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를 사모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 자체에 있을까? 아니면 기도의 시간과 방법에 있을가?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사랑받기를 기뻐하신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기쁨의 모습으로 다가가도록 목사는 설교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설교를 보자. 깊은대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오리를 가라고 하면 십리를 가 주어라. 삶속에서 나오는 아주 쉬운 설교이다.
어떤 이들은 목사님께서 설교 시간에 가요를 불렀다고 유튜브로 난리를 치는데, 아니, 애국가도 부르고 가요도 부르면서 그 속에서 주님을 찾아 만나게 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의 설교가 눈에 들어 온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그리고 자신이 실존하는 복음이시다. 아주 쉬운 설교로 감동을 주는 위대한 설교자 예수님의 설교를 생각한다면, 오늘날 새 에덴교회처럼, 비대면 가운데도 모여 찬양하고 예배케 하는 설교 어떠한가?
풍랑을 잡잠케하는 설교 - 바람아. 파도야 잔잔하라...
소강석 목사의 강점은 아주 쉬운 설교였다. 소강석 목사, 그의 설교는 방향성을 주는 설교였다. 한가지 방법으로의, 열심히 아니라, 방향에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리리로 가게 하는, 소 목사가 한 주간 설교를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 따라 새에덴교회 성도들 삶이 방향을 잡고 일하며 삶이 변하는 코칭설교였다.
설교는 소강석 목사의 설교처럼 쉬어야 한다. 소 목사의 설교처럼 설교는 삶의 기쁨과 소망을 주는 설교이어야 한다. 소강석 목사의 설교를 듣노라면, ‘저 지평선 넘어에서 오는 주님을 보아라’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을 기억케 한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 설교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설교였다.
소 강석 목사의 설교를 볼 때 그 귀한 시간에 그 분이 폼을 좀 잡고 한다면 고상한 언어로 형이상학적이며 차원이 아주 높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소 목사는 아주 쉬운 설교로 세상을 풍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가고 있는 것이다.
소 목사의 설교를 듣다 보면 내용이 철학적이고, 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이고, 그러면서도 신학적인 주류를 이룬다. 어떤 때는 심리적인 부분을 다루는 설교도 한다. 다양한 학문적 가치가 있는 설교였다. 물론 복음을 전하면서이다. 그런데 설교시간에 가곡 하나, 둘 불렀다고 이런 저런 이야기?.
사실. 설교는 원칙이 없다. 두괄식. 미괄식. 양괄식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사실 설교는 신학의 전달이 아니다. 교리 전달도 아니다. 그리고 철학, 심리학 전달도 아니다. 그리고 설교가 성경 내용을 재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공부 시간에 하면 된다. 설교는 결국 복음 전달이다. 쉽게...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의 전달이다. 예수님을 보라. 심오한 진리도 자연을 바라보면서 시인처럼 아주 쉽게 전달하신다. 소강석 목사와 같은 쉬운 설교는 전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왜 그리 어려운 제목으로 설교 하는냐 하겠지요?
소강석 목사가 다루는 설교는 아주 우리가 쉽게 접하는 사회학적인 내용 들에서 소개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인문학적으로, 감동하도록, 그러니 성도는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고 나가도 들어가도 복을 받는 것이다.
새 에덴교회 성도들의 얼굴 모습을 보라 얼마나 진지하게 설교를 듣는가?
감동으로 설교해야 되지 않겠느냐이다. 소강석 목사! 사실. 신학, 철학적이다.
그러나 한 주간 동안 세상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터에서 살다가 교회를 찾은 성도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설교를 통해 아주 쉽게 하고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성도를 사랑하면서 설교를 하고 성도들은 은혜를 받는데,왜 이 교회를 나오지도 않으면서 나리인지? 누가 돌을 던 질자인지요?“
아무리 원칙적으로 설교를 구사한다 해도 감동을 못 주면 성도는 졸다 간다.
‘당신의 설교는 설교 듣는 성도를 졸게 하는가? 새 힘과 소망 용기를 주는가?
소강석 목사와 같은 가요도 부르면서 편곡까지 하면서.. 하모니카를 부르면서... 하는 알아듯게 하는 쉬운 설교는 그 누가 비판할, 비판 받을 설교가 아니다. 오히려 성도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용을 더 정확하게 알게 하는 설교인 것이다.
최근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대해 유튜브로 비판하는 이들이 몇분 있다. 거룩한 강단을 이야기하면서 설교 시간에 대중가요를 불렀다는 등 비판을 하는 이도 간혹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강석 목사의 목회 철학에서는 더 거룩한 성전에, 온 성들이 나와,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을 만끽게 하는 고단수의 소강석 목사의 설교 철학을 본다.
소강석 목사는 오르지 ’믿지 않는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설교이다. 좌절된 심령들이 주께 나와 소망을 얻게 하는 설교.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을 경험케 하는 설교였다‘.
제자들과 함께 배에 앉아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비유설교를 많이 하셨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열처녀, 드라크마, 양, 문, 씨뿌리는 비유 등. 예수님의 설교는 아주 쉬운 설교이다. 그리고 강의처럼 딱딱한 설교가 아니라, 눈송이처럼 달콤한 설교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만나게 하는 정신이 확 들게 하는 설교이다.
새 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는 설교많큼 성도들을 세워간다.
소강석 목사의 설교는 어떠한가? 듣기 쉬운 설교, 감동적인 설교, 소강석 목사 설교를 들으면, 한마디로 예수님 처럼, 쉬운 설교이다. 어려운 설교는 성도를 졸게 한다. 교회 못오게 한다. 설교는 소강석 목사처럼 쉬운 설교로, 복음을 전하며 설교를 해야 한다.
또한 소강석 목사의 설교는 성도들과 같은 눈 높이에서 공감하는 설교이다.
그의 설교를 보라 성도들이 이해토록 하는 설교이다. 모두가 알아듣도록 하는 인카네이션 설교이다. 설교 속에서 자신을 발견케 한다. 성도들이 꼭 들어야 할 새 힘을 주는 설교였다. 행동하는 몸짓의 설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복음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