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의학번역서 '인체구조 학습도감', '3일만에 읽는 뇌의 신비'. |
직장을 그만두고 나 자신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고 사는 시간이 있었다. 젖먹이를 둘이나 데리고 뭘 할 수 있었겠는가. 이 무렵 동창회에서 주소록을 만들었다고 보내왔다. 집주소・회사명・직위・전화번호 등등 잘 만들어진 책자는 동문들의 근황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주소 외에는 딱히 기록할 것이 없어 초라할 내 이름을 찾아보니, 이게 웬일인가 ‘전문번역가’라는 단어가 붙어있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나는 <3일만에 읽는 일본사> <3일만에 읽는 세계사>(서울문화사)라는 역사서를 번역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기억한 모양이다. 그래도 ‘번역가’라는 단어 앞에 민망하고 송구했다. 당치도 않는 엄청난 단어가 고맙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50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정말 ‘번역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그 많은 책 가운데 역사책은 더 이상 없다는 거다. 수학과 관련된 책과 의료와 관련된 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수학책도 그렇지만, 의료와 관련된 책을 번역하게 된 것 역시 ‘3일만에 읽는’ 시리즈를 번역하면서이다. 의학을 공부한 사람과 한집에 살고 있으니 번역 가능할 것이라고 떠맡은 책이 <3일만에 읽는 뇌의 신비>였다. 외과전문의 박선무와 함께 작업한 첫 역서이다. 역자 소개란에 ‘이 책은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한 첫 역서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후 의학지식이 필요한 책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번역했다.
일이란 내가 희망하고 계획한대로 되는 일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연한 만남과 순간의 선택, 이런 것들의 오묘한 짜임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책이라면 교과서 외에는 잘 읽지도 보지도 않았던 내가 책을 번역하고, 그것도 의학서적을 주로 번역하게 된 것 역시 계획된 나의 삶이라기보다는 우연한 만남과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애정을 가지고 잘 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되었다.
먼저 초벌번역을 마치면, 박선무 선생은 의학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체크하면서 교정한다. 그리고 완성된 글을 다시 내가 검토한다. 의학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쉬운 단어로 고치고 또 고친 글을 박 선생이 재확인하는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 그리고 편집부로 보낸다. 반복된 과정을 거쳤음에도 편집부로 보내는 원고가 매번 만족스럽지는 않다. 보고보고 또 봐도 다시 손을 대야할 곳이 있을 것 같아, 보내고 난 원고를 다시 꺼내 교정을 보는 일도 있다.
어떤 책을 번역할 때 전문용어에 대한 지식은 중요하다. 의학과 관련된 책은 더욱 그러하다. 뇌 구조를 설명하면서 ‘전두엽’, ‘두정엽’, ‘후두엽’, ‘측두엽’ 등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을 나열했다.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의학용어는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한자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따라서 위의 단어들을 한자로 표기하는 것만으로 어느 부위에 위치하는 것인지 대강 감이 온다. ‘전두엽(前頭葉)’, 괄호 안의 한자를 통해서 머리의 앞부분임을 알 수 있다. ‘후두엽(後頭葉)’은 뒷머리, ‘측두엽(側頭葉)’은 옆머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의학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재면 내과의사가 번역한 기린원의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몸>, 도서출판 정담에서 출간한 <원색인체해부학> 그리고 <의학용어사전> 등을 참고하면서 순우리말로 쓸 수 있는 단어는 그렇게 표기하고 싶었다. 2002년 <3일만에 읽는 뇌의 신비>를 번역할 때, 전두엽을 ‘전두엽’으로만 기입할 것인지, ‘앞머리엽’이라 해야 할지, ‘이마엽’이라고 해야 할지,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야할지 고민 고민하다 결국 ‘전두엽(앞머리엽)이라고 표기했다. 그리고 ‘두정엽(머리꼭대기엽)’, ‘후두엽(뒷머리엽)’, ‘측두엽(옆머리엽)’이라고 표기했다. 그런데 모든 용어를 일괄적으로 이렇게 할 수는 없었다. ‘시상전내측부(視床前內側部)’, ‘전뇌기저부(前腦基底部)’처럼 괄호 안에 한자를 기입한 것도 숱하다.
뇌와 관련된 지식을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행하는 책 <해마>(은행나무, 2003)에서는 그림으로 뇌 투시도 같은 것을 제시하는데 ‘대뇌 cerebrum, 소뇌 cerebellum, 편도체 amygdala, 해마 hippocampus’ 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처리했다. 아무 고민도 하지 않았다.
2013년, 궁금한 인체구조를 알기 쉽게 설명한 인체 대백과사전이라는 수식어를 단 <인체구조 학습도감>(중앙에듀북스)을 번역하면서 의학용어의 우리말 표현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되었다.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인체의 구조와 움직임, 병의 원인과 증상을 그림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이다. 각 기관마다 주요 병의 원인과 증상에 대한 설명까지 더하니 역자 입장에서는 ‘의학용어 총집합’과 같은 책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번에는 순우리말로 야심차게 번역을 시작했다. 머리뼈, 목등뼈, 넓적다리뼈, 등골뼈 등 시작은 좋았다. 두개골, 요추, 대퇴골, 척추보다 훨씬 좋다고, 탁월한 선택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번역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문제는 점점 불거졌다. 복근을 배근육, 승모근을 등세모근, 상완삼두근을 윗팔세갈래근, 대퇴이두근을 넓적다리두갈래근이라고 적고 보니 이것 역시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남자 연예인의 복근이 주목을 받고 있다. ‘남성미 물씬 풍기는 복근 공개’와 같은 제목의 글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말을 고집하고 ‘배근육’이라고 한다면 이거 역시 난센스다.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원위치로 돌아가 상완삼두근(윗팔세갈래근), 대퇴이두근(넓적다리두갈래근)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했다. 두개골(머리뼈), 요추(목등뼈), 척추(등골뼈)라고 표기했다.
10년 전과 별반 달라진 것도 없다. 단, 담당편집자의 주문이 있었다. 괄호 속에 한자를 기입하지는 말라는 거다.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니 한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이들에게 한자는 시각적 스트레스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했다. 이렇게 책은 만들어졌다. 달팽이관을 와우관이라 하지 않고, 중이염을 가운데귀염이라 하지 않았다. 한자어이건 순우리말이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책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아름다운 우리말의학전문용어 만들기>(커뮤니케이션북스)라는 이름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체구조 학습도감>을 번역하기 전에 이 책을 접했다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아쉽게도 참고하지 못했다. 이런 책이 출간된다는 것은 의학용어의 우리말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어떤 ‘약속’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 거다. 여하튼 의학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꾸건, 한자어와 병용하건 어떤 통일된 지침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고선윤 백석예술대학교 외국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