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실에서
조선족이몽령 김영철씨와 함께
가을의 향기가 그윽한 신쥬쿠의 어느 저녁 우중충 고층건물과 황홀한 샨데리아, 쉬움을 모르는 번화도시의 소음속을 벗어나 한 십분정도 걸었더니 아늑하고 조용한, 서민의 내음을 느낄 수 있는 주택가가 나타났다.
중국 연변에 특별한 흥미를 갖고 있다는 재일코리안 소프라노가수 전월선씨의 저택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메모한 주소대로 초인종을 눌렀더니 까만색 원피스의 그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해협을 넘나들며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가수로 널리 알려진 전월선.
일본과 한국의 텔레비죤프로에서 여러번 연변을 안내하는 프로그램을 맡은적 있다면서 만나자마자 연길, 훈춘, 도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너무나 유명한 인물인지라 심호흡을 거듭하고서야 들어온 필자였는데 순식간에 탱개가 플림을 어쩔 수 없었다.
2016 년도 제 71 회 일본문화청예술제에 참가하게 된 오페라 <더 라스트 퀸> 의 공연준비때문에 다망한 분위기가 연습실 구석구석에서 느껴졌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과 일본황족 나시모토미야마사코(梨本宮方子)여왕의 진정한 사랑이야기를 창작오페라에 담기 위해 거의 10년을 준비해온 전월선씨,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이며 한국의 어머니로 인정받은 리방자의 파란많은 일생은 국경을 넘어선 위대한 사랑을 보여준다고 품안의 자식과 같은 <더 라스트 퀸>에 대해 거침없는 설명을 하고 또 했다.
조선, 한국, 일본 등 세 나라의 수뇌자앞에서 독창을 선보인 유일한 가수로 이름이 있고 또 최근에는 일본외무대신상까지 받은 전월선, 그가 소프라노가수로 성공하게 된 것은 예술을 사랑한 부모님의 영향과 천부적인 재질,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는 강한 성격이 받쳐주었기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예술가를 꿈꾸어왔던 그가 클래식음악의 길을 택하게 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사업의 실패로 가정생활이 어렵게 된 시기가 있었다. 그토록 아끼던 피아노까지 잃게 된 현실앞에서 어린 월선이는 자기 몸하나로 도전할 수 있는 소프라노의 세계가 보였다고 한다. 오직 건강한 몸과 피타는 노력, 그리고 실력만 있으면 꼭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희망…
헌데 현실은 잔혹하였다. 어릴때부터 줄곧 조선민족학교를 다녔던 그의 경력을 일본사회가 승인하지 않았던 그 시기. 음악대학에 원서조차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때의 그 기억은 지금도 지울 수 없다.
다행히 그의 천부적인 음악재질과 가능성을 보아낸 몇몇 전문가들의 힘으로 일본음대의 명문인 도호가쿠엔(桐朋学園)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1983년에 성악계에 데뷰한이래 1985년 ‘소리’, ‘스페인의 때’ 의주역으로 오페라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그후 ‘춘희’, ‘도화사’, ‘카르멘’, ‘나비부인’,‘휘가로의 결혼’등 여러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유럽무대에서도 드라마틱한 노래소리와 화려한 무대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그래도 외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해와 배려가 깊어져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잠시 지난 과거에 대한 서러움을 떠올렸다. 외국인이 발을 붙이려면 국적과 이름을 바꿔야만 가능했던 어려운 전업인 예술세계였다. 하지만 자기이름 석자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며 어쩔 수 없었던 어려운 주위환경속에서도 본명 석자로 버텨온 전월선, 그래도 어려운 분야에 도전한 보람으로 국적보다 재능을 알아주는 분들의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감격했다.
2001년에 한국에서의 오페라 <춘향전>공연때 중국조선족의 이몽령과 만나서 원만한 합작을 마쳤다는 전월선씨이다. 반평생을 두고 민족의 화합을 불러온 그가 중국조선족을 깊이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주목받았던 중국조선족 이몽룡이 바로 현재 중국음악학원 음악계부주임직을 맡고 있는 중국성악계에서 유명한 성악가 김영철씨이다.
“2002월드컵기념으로 한국오페라극단의 요청을 받고 한국무대에서 <춘향전>을 공연하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 전월선씨를 만났어요. 일본에서 인정받는 조선민족의 성악가라고 들었습니다. 함께 공연하면서 격정이 넘치고 표현력이 대단한 분이라는 인상이 아주 깊었습니다.”필자는 잠간의 전화통화로 전월선씨에 대한 인상을 여쭤 보았다.
데뷰 33년을 맞는 전월선씨가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을 웨치며 리사이틀과 콘서트에서 반드시 부르는 노래가 있다. 바로 이산가족의 슬픔과 그리움을 그린 대표곡 <고향산천 내사랑>이다.
“남이나 북이나 그 어데 있어도 우리는 다 같이 정다운 형제가 아니련가
동이나 서이나 그 어데 살아도 우리는 다 같이 그리운 자매가 아니련가”
온몸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에 눈물을 훔치는 관중들이 세계각국 가는 곳마다에 있다.
외국인, 이방인의 서러움을 겪었던 그녀가 전하는 사랑의 멧시지는 지구촌 구석구석에 어김없이 전해지고 예술의 힘을 입은 평화의 웨침은 멜로디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남쪽은 부모님고향이고 북쪽에는 형제들이 살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중국연변의 도문시의 땅을 밟으며 다시 한번 느꼈다면서 민족의 화합과 동아세아 평화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숙명으로 다지는 전월선이다.
최근 화제로 끓었던 연변가무단의 무극<아리랑>을 꼭 보고 싶다면서 언젠가 연변의 무대에서 오페라 <춘향전>을 선보이는 또 하나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평화의 가희(歌姫)의 아리아가 중국연변에 울려 퍼지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이홍매 일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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