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림동의 중국 분식점
저녁 5시 붉은 간판이 켜지자 구이 기술자가 장갑을 끼조 구이틀 앞에 섰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닭갈비, 건두부 그리고 굴도 있다.
어떻게 보아도 이것은 중국의 보통 구이점으로서 별로 대단한 것이 없지만 서울 중심 중구와 근근히 약 10 km떨어져 있고 길이가 200m도 안되는 길가에 도처에 ‘구이’,’충칭 샤브샤브’,’오리목’,’매운탕’등 중국어 간판이 걸려있다. 식당 테이블에는 칭다오 맥주(青岛啤酒)가 놓였는데 손님이 한국말이 섞인 동북 악센트의 중국말로 한담을 하며 노래방 문앞 광고판에는‘최신 중국곡’이라고 씌어져 있다.
9월 14일 중국 신화망 보도에 따르면 여기가 바로 대림동으로 서울 서남부, 한강과 가까운데 한국 매체가 ‘대림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는 서울에서 생활하는 중국인 거주 지역의 하나이다. 1992년 중한 수교후 일부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 드림’을 안고 대림동에 정착했으며 2016년 한국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대림동내 번화한 거리라고 부르는 대림 2동 거주자(24461명’중 40%(9874명) 중화권 인구가 있었다.
“이 거리에서 개점을 한 대부분 사람들이 조선족이다.”고 진민(金闵,김민) 가이드가 말했다. 그녀도 조선족이지만 ‘회식’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이곳에 오지 않는다.’ 원인은‘더럽고 혼란하며 서비스가 나쁘기때문’이다. 매번 저녁에 이곳에 와 식사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먹는 모습을 보고나서 싸움질하는 등 원인이다.
진민은 이미 학국국적에 가입했다. 그녀는 일부 한국인들의 견해를 대표했다. 조기 한국에 와 일하는 중국인 다수가 막노동과 식당 일을 하여 대림동이 일찍 서울에서 대표적인 낙후한 지구의 하나로 됐으며 또 한동안 범죄 다발지대였다. 한국매체 보도에 따르면 4개월전 어느날 저녁 대림동에서 인명피해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은 지난해 12월이후 또 대림동에서 발생한 인명사건이었다.
한국 영화에서는 대림동이 심지어 난자 판매를 하는 범죄 사회조직의 집거지로 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림동의 중국사람들로 말하면 이곳의 생활이 기타 거리에 비해 별로 다른 점이 없다. 한취잉(韩曲颖)은 대림동의 한 두리언커피숍에서 호스티스로 일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대림동의 부정 뉴스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 대림동이 나쁘다고 말하며 치안이 혼란한 점이 무엇이 나쁜가? 내가 보건대 기타 지역과 별로 다른점이 없다. 밥먹는 곳이 좀 많은 것도 벅적벅적하여 좋다.”
대림동에서 한취잉은 충칭 완저우 생선구이(重庆万州烤鱼)를 가장 잘 먹는다. 식사시간에 식당의 TV에서 스포츠 경기 시간에 중국팀과 한국팀 경기를 보면 틀림없이 중국 팀을 응원한다. 그녀는 자기가 ‘위는 중국위고 심장은 중국 심장이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래도 한국에 온 원인이 무엇인가? 묻는 말이 떨어지자 그녀는 즉각 “무엇이겠는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
‘생동한 차이나타운’
한취잉과 마찬가지로 쟝린(姜琳)도 하얼빈에서 왔다. 그녀들은 모두 대림동의 한 두리언 커피숍에서 일을 한다. 이 커피숍 주인은 중국 산시(山西)인이다. 쟝린은 방금 만 20세가 됐는데 4년전에 서울에 왔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조선족 학교에서 학습하여 한국에서 한동안 지난후 그녀의 한국어가 중국어보다도 더 유창하게 됐다.
2012년부터 한국 법무부는‘재외동포 비자(F-4)’를 확대 발급했다. 한국 주중 대사관이 입국 목적으로 비자에 대해 진행한 분류에 따르면 대학교 졸업생, 법인 대표. 대학교 교사, 연 판매액 10만 달러 이상에 달하는 개인상공업자를 포함한 11종 조선족 군체가 모두 F-4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쟝린은 한국에서 바리스타 양성반에 참가하고 버리스타 자격고시를 통과한후 F-4비자를 취득했으며 한국에서 장기노무를 시작했다.
쟝린의 부친은 한국국적을 소지하고 집식구들은 모두 이미 하얼빈에서 서울에 옮겨 왔으며 이전에 공부할때 알게된 조선족 친구들 다수도 집 전체적으로 한국에 옮겨왔다.
친인척과 친구들이 모두 곁에 있게 되어 비록 이국생활을 하지만 그녀는 고독한 감을 느끼지 않는다. “돈을 벌지 못할때만 돌아갈 생각을 한다. 이곳에 있을 면목이 없는 느낌이지만 집식구와 친구들이 모두 이곳에 있어 돌아가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수입은 그들이 남아있는 중요한 원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커피숍에서 일하는데 한 시간에 7천 여원(40여 위안 인민폐)으로 노임이 국내보다 더 많다.” 한취잉은 “우리 할아버지 그 시대 한국에 옮겨 오는 것이 가능하게 이 토지에 대해 감정이 있었겠지만 나의 부모와 우리 이 세대 사람들은 기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고려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한취잉은 서울의 한 여행사에서 일했다. 지난해 3월 사드사건후 국내여행사들이 연거푸 한국여행단 상품을 철수하여 중국 단체 관광객들의 단체 방한 수량이 대폭 감소됐다. 한취잉이 소재한 여행사는 부득불 휴업을 하게 되고 그녀는 친구를 통해 이 커피숍이 웨이트리스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게 됐다. 주인은 중국인이므로 즉각 건너왔다.”
이전에 회사에서 일할때 한취잉은 한국 점주를 만날때면 일을 그릇칠가봐 언제나 매우 조심했다.”매우 선명한 상하급 관계이다. 상급에 대해 태도가 공손해야 한다.” 그녀는 현재의 이 중국 점주를 더 좋아한다.” 무슨일이 있으면 그녀와 토론할 수 있다. ”한취잉은 대림동을 조선족 거주 지방이라고 부른다.”주변의 동들은 모두 한국인 지역으로 좀 서로 분리되는 느낌이다.”
한국 매체 보도에 따르면 금천구에 거주하는 한 한국인은 그의 그곳에서 생활하는 중국인들도 적지 않는데 대림동에 와 보고 이곳은 그야말로 중국이며 생동한 차이나타운이라고 크게 놀랐다.
한취잉은 이러한 생동한 느낌을 좋아한다. 저녁이 되면 울긋불긋한 간판이 모두 빛을 발사한다. 식당에서는 고기 구이 향기가 풍기며 적삼을 입은 남자들이 맥주배가 바싹 졸라매여졌는데 그들은 테이블 하나를 높고 플라스틱 의자를 몇개 옮겨 놓은후 식당 문앞에 앉아 고기 구이에 맥주를 마신다. “문제는 화기가 좀 있는 것이다.”고 한취잉이 말했다.
‘그들은 저마다 고향을 그리워한다’
쟝타이훙(姜泰宏)이 한국도 꼬치가 유행되던 일이 3년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그들에게는 양꼬치에 칭다오 맥주를 마신다는 말이 있다.”
2013년 쟝타이훙이 지린 쟈오허(吉林蛟河)에서 한국에 왔는데 처음에는 한국이 창설한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이후 자기가 식당을 열어 작은 장사를 할 것을 생각하고 요식업으로 직업을 바꾸고 한국인이 연 식당에서 한동안 주방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올해에 그는 구이점 개설을 계획했을때는 대림동 집세가 이미 매우 높아졌다.
조선일보의 2016년 보도에 따르면 대림동 일대의 점포 월세가 지난 3년간 2배 이상 올랐다. 근일 한 사람이 웹사이트에 가옥전대 정보를 발표했는데 대림동 우체국 부근의 10평(약 33㎡)점포 보증금 1천만원(6만위안 인민폐), 월세가 102만 원(7120위안 인민폐)에 달했다.
“많은 중국인들이 개점을 하여 집세가 순식간에 인상됐다. 현재 이곳(집세)도 명동과 좀 낮고 기타 구에 비해 많이 높아졌다.”고 진민 가이드가 말했다.
그러나 쟝타이훙은 그래도 식당을 이 곳에 선정했다.”전 서울의 중국인들이 토요일에 대체로 모두 이곳에 모인다. 기타 중국인 지구에 비해 이곳 사람들의 흐름량이 더 크다.”
중국인 외 대림동이 한국인들의 눈에 역시 중국 요리를 식사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예를 들면 스촨 샤브샤브는 한국인들이 비교적 먹기 좋아하는 음식이다. 어떤 한국인들은 중국에 출장갔다가 좋은 음식을 먹어보고 한국에 돌아온후 대림동에 와 찾아오고 있다. 어떤 사람은 미식 프로 소개를 보고 역시 이곳에 찾아와 맛를 본다.”
이것이 또 일부 한국인들의 대림동에 대한 고정적인 인상을 개변시켰다. 한 한국 네티즌은 “이전에 게시판에 항상 대림의 중국인들이 몸에 수시로 칼을 차고 있다는 말이 전해졌는데 내가 대림동에 가보니 이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조금도 그곳 중국인들이 포악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저마다 고향집을 그리워 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쟝타이훙의 식당은 개장한지가 이미 한달이 됐는데 찾아오는 고객들이 대체로 모두 고향친구들이며 쇠고기 꼬치 맛이 매우 친절하다고 말해 그가 각별히 고무를 받고 있다.
“만일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릴적에 익숙하던 맛 음식을 먹게 되면 나는 매우 만족한다.”
한국에 처음 왔을때 쟝타이훙은 고독감을 느꼈다. 그도 역시 조선족이지만 엄마와 그들 두 사람이 서울에 와 분투를 했다. 신변에도 친구가 한국에서 한동안 일한후 또 중국에 귀국했다. 처음에 쟝타이훙과 친구들의 견해가 같았는데 거주 시간이 길어지자 천천히 식어졌다.
“힘들게 이곳에 적응했는데 혹시 수시로 돌아가고 또 다시 재차 시작할 수도 있다.”
쟝타이훙은 매년 중국에 한번씩 돌아가며 매번 돌아가면 적응되지 못하는 감을 느낀다.”다른 사람들은 디디콜로 택시를 타는데(滴滴打车) 우리는 손을 흔들어 차를 세운다. 다른 사람은 워이신(微信,위챗)으로 지급하는데 우리는 현금을 사용한다.”
쟝타이훙의 고향 지린 쟈오허(吉林蛟河)에서 조선족들이 사용하는 조선족 악센트가 한국 부산지구에서 사용하는 한국어 악센트와 비슷하다. 이전에 회사에서 일할때 그의 한국 동료들이 “당신이 바로 한국인이다.”고 항상 말했다. 그는 그때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중국인이다.”고 대답했다. 서울에서 근 5년을 생활한후 그는 한국 그린카드를 신청하고 한국 영주권을 소지했다. 쟝타이훙은 여전히 자기가 외지인인 감을 느끼며 완전히 한국인 가운데 융합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한국 뉴스를 관심하지 않으며 지난해 한국 대통령 총선을 관심하지 않는다.”나는 선거권이 없다. 나에게 있다고 해도 나의 표 하나가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진민 가이드도 그와 비슷한 견해이다.”나에게는 선거권이 있지만 나는 구직이 선거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나는 포기하고 선거에 참가하지 않았다.”
기타 구역에 한동안 거주한후 쟝타이훙은 또 대림동에 이전했다. 비즈니스와 생활이 모두 이곳에 있으며 고향친구들과 항상 만나며 한가할때가 되면 맥주를 마시고 한담을 한다.
‘이미 온 이상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대림동 불고기권에서 장징청(张晶程)과 남편은 다른 종류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도림로 38호거리에 별로 많지 않는 한족 식당주인이다.
장징청은 스촨(四川)인으로서 2007년 모친을 따라 서울에 와 노무를 했는데 처음 왔을때 한국말을 할 줄 몰랐으며 식당에서 식기세척공으로 일했다.후에 회사와 한국 식당을 찾아 일했으며 돈을 좀 번후 식당개장을 준비하고 2009년 대림동에 이전해 거주했다. 그리고 직업 원인으로 기타 거리에서 한동안 살았다. “나는 기타 지방이 습관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또 다시 돌아왔다. 가능하게 중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더 적응되는 것 같다.”
장징철으로 말하면 대림동이 그녀에세 가장 많은 친절감을 주는 지방이다. 뉴스에서 대림동의 부정 소식이 나오면 그녀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기실 대림동은 매우 안전하다. 돈있는 사람도 많다. 이곳을 보라, 집세도 비싸고 식사비도 비싸다.” 지난달 장징청 집의 불고기점이 지점을 개설했다. “이 지점 하나만해도 집세가 210만 원(1.26만 위안 인민폐)에 달한다. 이 한달동안 나는 반드시 800만(4.8만 위안 인민폐)를 벌어야 집세와 종업원 노임을 벌수 있다.”
친리리(秦丽丽)는 지난달 장징청의 불고기점에 와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한국에 오기전 그녀는 한국 예능프로와 한국 드라마를 보기 좋아했으며 서울에 대해 꿈이 가득했다. 그러나 동대문에 가본후 이 꿈이 깨졌다. 그녀는 이미 썰어놓은 쇠고기를 마주하고 고기를 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경력을 말하면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나 동대문에 가봤는데 너무도 초라해 크게 실망했다.”
한국에 온후 친리리는 한국 드라마를 더는 보지 않았다. 한국 드라마중의 정교롭고 유행적인 생활이 그녀가 접촉한 것과 전혀 같지 않았다. 그는 후회하면서 “그러나 일단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갈수는 없다. 그럭저럭 지내는 수밖에 없다.” 한국에 오기전 친리리는 한국의 과일 가격이 비싸다는 말을 듣고 연거푸 반달동안 수박을 먹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길어지자 여전히 과일, 해물을 먹고 싶어졌다. 어느 한번 남편이 2만 7천 원(162위안 인민폐)로 게 세마리를 샀다가 그녀의 잔소리를 오랫동안 들었다.
이에 비해 장징청은 이미 한국에서 자기 사업을 시작하고 한국 국적을 땄으며 두 아이도 한국의 학교에서 교육을 접수하고 있다. 그녀로 말하면 타향에서의 분투의 가장 힘든 시기가 이미 지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구이점, 샤브샤브점과 각종 중찬관(中餐馆)에서 음식물에서 피어 오르는 더운 김이 흩어졌다. 대림동이 조용해지고 네온등 간판만이 번쩍이는데 ‘조선족 차이나 타운’에서 걸어나와 곁에 있는 대림지하철쪽으로 들어가 100m 거리를 걸어 또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
傍晚5点,红色招牌亮起来了,烧烤师傅戴上手套,站在烤架前,等待他的是鸡架、豆皮还有生蚝。
无论怎么看,这都是一家极其普通的东北烧烤店,没有什么值得一提的地方,但它距离韩国首尔市中心中区只有约10公里,在这条不足200米的街道上,到处挂着“烧烤”“重庆火锅”“鸭脖”“麻辣烫”的中文招牌。餐馆的桌上摆着青岛啤酒,客人用韩语夹杂着东北口音的中国话聊天,练歌房门口的广告牌上写着“最新中国曲”。
这里是大林洞,首尔西南部,靠近汉江,又被韩国媒体称为“大林中国城”,生活在首尔的中国人社区之一。1992年中韩建交后,一些中国的朝鲜族怀着“韩国梦”来到大林洞定居,2016年,据《朝鲜日报》报道,大林洞内被称为繁华街道的大林二洞居住者(24461人)中,有40%(9874人)是中华圈人口。
“在这条街上,开店的大部分都是鲜族人(中国的朝鲜族)。”导游金闵说,她也是朝鲜族,但“除了聚餐,一般不上这儿来”。原因包括:“脏、乱、服务不好。每回晚上来这儿吃饭喝酒,都看见有人吃着吃着就吵起来。”
金闵已经加入韩国国籍,她代表了一些韩国人的看法。由于早期来韩国工作的中国人大多从事散工劳动和餐馆工作,大林洞曾经是首尔代表性的落后地区之一,也一度被认为是犯罪多发地。据韩国媒体报道,四个月前的一晚大林洞发生了命案,这是继去年12月后,又一起发生在大林洞中国人之间的命案。在韩国电影里,大林洞甚至成为贩卖卵子的黑社会组织聚集地。
而对于大林洞的中国人来说,这里的生活跟其他街区并没有什么不同。韩曲颖在大林洞的一家榴莲咖啡馆做服务员,她不喜欢听人说起大林洞的负面新闻,“都说大林洞不好,治安乱,有什么不好的?我觉得跟其他社区没啥两样。就是吃饭的地方多点儿,热闹。”
在大林洞,韩曲颖最喜欢吃重庆万州烤鱼。吃饭时间,赶上餐馆的电视上播放体育赛事,碰到中国队和韩国队的比赛,那肯定要给中国队加油。她称自己:“胃是中国胃,心是中国心。”
那为什么还要来韩国? 提问的话音刚落,她脱口而出:“还能因为啥,赚钱呗。”(夜晚,大林洞道林路38街上,各式的中国饭馆招牌亮起灯。)
“活生生的中国城”
和韩曲颖一样,姜琳也来自哈尔滨,她们都在大林洞的一家榴莲咖啡店打工,这家咖啡店的老板是山西人。姜琳刚满二十岁,四年前来到首尔。因为从小就读朝鲜族学校,在韩国生活一段时间后,她的韩语比中文讲得还要流利。
从2012年开始,韩国法务部扩大发放“在外同胞签证(F-4)”。根据韩国驻华大使馆以入国目的对签证进行分类的说明,包括大学毕业生,法人企业代表,大学教师,年销售额达十万美元以上的个体户等在内的11类朝鲜族群体,均可申请F-4签证。
姜琳在韩国参加了咖啡师的培训,通过咖啡师资格考试之后,获得了F-4签证,开始在韩国长期打工。
姜琳的爸爸拥有韩国国籍,家人都已从哈尔滨搬到首尔,以前读书时认识的朝鲜族朋友,大多也举家迁至韩国,亲人朋友都在身边,虽说是到了异国生活,她也不觉得孤独。“只有挣不到钱的时候想回去,感觉没脸搁这儿待着,可是家人朋友都在这儿了,回去也没几个认识的人。”
收入是让他们留下的重要原因。“比如我们在咖啡馆工作,一个小时7000多韩元(约合人民币40多元),工资要比国内高很多。”韩曲颖说,“我们爷爷那辈,迁到韩国可能是对这片土地有感情,到了我的父母和我们这代人,其实大部分都是为了经济上的考虑。”
之前,韩曲颖在首尔一家旅行社工作,去年3月萨德事件之后,国内旅行社陆续下架赴韩旅行团产品,中国团体游客赴韩数量大幅减少,韩曲颖所在的旅行社不得不歇业,她通过朋友打听到这家咖啡馆招店员,见老板是中国人,便十分乐意过来。
以前在会社工作时,韩曲颖碰到过韩国老板,她总是小心翼翼,生怕做错了事,“有很明显的上下级别的关系,对上级要毕恭毕敬。”她更喜欢现在这个中国老板:“有什么事可以和她商量。”
韩曲颖把大林洞称作鲜族待的地方,“周围的洞是韩国人的,感觉有点儿互相分隔的感觉。”
韩国媒体报道,一位住在衿川区的韩国人说,他那里生活的中国人也不少,可是到了大林洞,还是吓了一跳,这里简直就是中国,活生生的中国城。
韩曲颖喜欢这种活生生的感觉,一到晚上,红红绿绿的招牌都亮起来,饭馆里飘出烤肉的香味,穿着衬衫的男人,啤酒肚被衬衫紧紧地勒着,他们支起一张桌子,搬几个塑料凳,坐在店门口,就着烤串喝啤酒。“就是有烟火气。”韩曲颖说。
(大林洞里的中国面食店。)
“他们个个都很想念家乡”
姜泰宏发现韩国也开始流行吃串儿是在三年前,“他们有一句话叫吃羊肉串,喝青岛啤酒。”
2013年,姜泰宏从吉林蛟河来到韩国,刚开始在韩国人创办的会社里做职员,考虑到以后想自己开店做点小生意,便转行到餐饮业,在韩国人开的饭馆里做了一段时间帮厨。等到今年,他打算开家烧烤店的时候,大林洞的房租已经很高了。
根据《朝鲜日报》2016年报道,大林站一带地段好的商铺月租,过去3年之间上涨了2倍以上。近日,有人在网站上发布房屋转租信息,大林洞邮局附近的10坪(约33平方米)店铺,保证金1000万元(约合人民币6万元),月租为102万元(约合人民币7120元)。
“很多中国人来开店,房租一下就涨起来了,现在这儿(房租)也就是比明洞差点,比其他街区高很多。”导游金闵说。
但姜泰宏还是坚持把店选在了这个地方:“全首尔的华人,星期六星期日基本上全都聚在这儿。相比其他的华人街区,这里的人流量更大。”
除了华人之外,大林洞在韩国人眼中也是吃中国菜的好地方。“比如说四川火锅,是韩国人认为比较好吃的中国食物。有的韩国人因为去过中国出差,吃到过好吃的东西,回到韩国之后,会到大林洞来找,有的人看了美食节目的介绍,也会跑来尝尝看。”
这也改变了一些韩国人对大林洞的刻板印象。一位韩国网民说:“以前留言板上常有传言,说大林的中国人身上随时都带着刀,我去过大林洞,根本没有那回事!”他还留言:“我一点也没觉得那里的中国人凶狠,我倒看出来了,他们个个都很想念家乡。”
姜泰宏的店刚开满一个月,来的客人基本上都是老乡,有客人告诉他,牛小串的味道很亲切,这让他备受鼓舞。“如果在外面生活的人能吃到我们小时候熟悉的味道,我就觉得挺满足的。”
刚来韩国时,姜泰宏感到孤独。他也是朝鲜族人,但只有妈妈和他两个人来到首尔打拼。身边也有朋友在韩国打工一段时间之后,又回中国。刚开始,姜泰宏和朋友的想法一样,但住的时间久了,慢慢也就淡了,“好不容易适应这儿了,冷不丁地回去,又得重新开始。”
姜泰宏每年回一次中国,每次回去,都觉得不适应。“别人滴滴打车,我们就招手拦车,别人都微信支付,我们就给现金。”
在姜泰宏的老家吉林蛟河,朝鲜族人讲朝鲜语的语调和韩国釜山地区讲韩语的语调类似。以前在会社工作时,他的韩国同事常说:“你就是韩国人嘛。”他都回应:“不是,我是中国人。”在首尔生活将近五年,申请了韩国绿卡,拥有韩国永久居住权,姜泰宏仍然觉得自己是外地人,不能完全融入韩国人的圈子。
他不关心韩国时事,没太关注去年的韩国总统大选。“我没有选举权,就算我有,我那一票能产生什么效果呢?”导游金闵和他有类似的想法:“我有选举权,但是我觉得工作比选举重要,我就放弃了,没选。”
在其他街区住过一段时间后,姜泰宏又搬回大林洞,生意和生活全在这里,和老乡常常见面,也能在闲暇的时候,坐下喝喝酒,唠唠嗑。
“来都来了,不能空着手回去”
在大林洞的烧烤圈里,张晶程和丈夫算是异类。他们是道林路38街上,为数不多的汉族老板。
张晶程是四川人,2007年就随母亲来首尔打工。刚来的时候,她不会讲韩语,只能在饭馆里做洗碗工。后来陆续找到会社和韩国餐厅里的工作,攒了些钱后,开始筹备开餐饮店。2009年,张晶程搬到大林洞居住,后来因为工作原因,也到其他街区住过一段时间。“我在其他地方住不习惯,所以又搬了回来,可能是因为更适应和中国人生活在一起。”
对于张晶程来说,大林洞是带给她最多亲切感的地方,看到新闻上有关于大林洞的负面信息,她不置可否。“其实大林洞挺安全的,有钱人也多。你看这儿,房租也贵,吃饭也贵。”上个月,张晶程家的烧烤店开了分店,“光这个分店,房租就210万(约合人民币1.26万元左右),这一个月我必须得卖到800万(约合人民币4.8万元),才能把房租和店员的工资给挣出来。”
(张晶程的丈夫在自家烧烤店门前支起烤架,生蚝上浇好了调制的酱汁)秦丽丽上个月来到张晶程的烧烤店做服务生,来韩国之前,她喜欢看韩国综艺和韩国电视剧,对首尔充满憧憬。但自从去过东大门之后,这份憧憬就破灭了。她面对一盆切成丁的牛肉,正准备把它们串成串儿,说起当时的经历,皱起眉头:“我那天到东大门儿一看,怎么这么简陋的一个建筑,太失望了。”
来到韩国后,秦丽丽再也没看过韩剧,韩剧里精致、时尚的生活和她接触到的完全不一样,她有点后悔,“但来都来了,总不能这么空着手回去,只能凑活过着。”来韩国之前,秦丽丽听说韩国的水果价格贵,连续吃了半个月的西瓜。在韩国时间长了,还是想吃点水果、海鲜,有一回老公花了两万七千韩元(约合人民币162元)买了三只螃蟹,被她埋怨了很久。
相比之下,张晶程已经在韩国打拼出了自己的事业,拿到了韩国国籍,两个孩子也都在韩国的学校接受教育。对她来说,在异乡打拼最艰难的时刻已经成为过去。
夜色深了,烧烤店、火锅店和各式各样的中餐馆里,食物冒着的热气慢慢消散。大林洞安静下来,只剩霓虹招牌闪烁,走出“朝鲜族中国城”,拐进旁边的大林地铁站,走过100米的距离,又回到首尔。
/新华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