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김종철 기자(한겨레신문)가 SNS에 올린 배추 사진.)
주변에 농사꾼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도심 한가운데 살면서 근교의 농지를 빌려서 상추, 배추, 무 등 온갖 채소류를 재배하는 이른바 주말농장의 농사꾼들이다. 이들은 흙을 만지고 작물이 자라나는 과정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다. 이 기쁨은 하얀 와이셔츠의 꽉 조인 넥타이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보물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숨겨온 금송아지를 자랑이라도 하듯 SNS를 통해서 그 기쁨을 풀어놓는다. 그러니 이들이 수확한 것은 무공해 먹을거리만이 아니라 새로이 경험하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안다.
옆집 의사선생님은 5년차 농부다. 청계산 근처에 분양받은 10평의 땅은 그들의 먹을거리만 바꾼 것이 아니라 주말의 시간을, 더 나아가 삶을 바꾸고 있는 것 같다. 온갖 화제의 중심에는 텃밭이 있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가물면 가물다고 마음은 항시 청계산 텃밭에 가있다. 이제는 취미가 아니라 영락없는 농사꾼의 마음이다. 차를 마시다말고 “땅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생뚱맞은 말을 하면서, 자신들의 관심과 사랑에 반응하는 작물의 성장에 감사했다.
SNS에 배추를 한가득 담은 사진을 올린 선배가 있다. 직접 농사지은 것들이다. 이파리에 벌레 먹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는 하지만 꽤나 풍성하다. 올 김장은 이것이면 충분하겠다. 그건 그렇고 선배의 글이 재밌다. ‘출근 전 텃밭에 갔는데 시든 배추 한포기 없다. 다음 주까지 비소식이 없어서 물이라도 주려고 했더니 물탱크가 빈 통이라 그냥 왔다. 목마르면 배추 스스로 뿌리를 더 깊이 내릴 터이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베테랑 농부의 여유가 읽힌다. 목마르면 뿌리를 더 깊이 내리는 이런 진리는 어디서 배웠을까. 참 훌륭하다.
이어서 선배의 글은 교훈을 남긴다. 옆집 배추는 분홍색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 배추벌레 잡기 귀찮으면 그냥 둬도 될 터인데. 게다가 배추가 너무 크다. 화학비료를 사용한 듯하다. 또 다른 집은 벌써 배추를 묶었다. 이집 주인은 마음이 너무 급한 듯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농사야말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 벌레와 어느 정도는 나눠먹겠다는 마음가짐. 땅이 허락하는 한도까지만 키우겠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구절은 무공해 먹을거리만이 아니라 무공해 삶에 대한 태도까지 보인다.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 흙내음 머금은 단문 속에서 깊은 철학을 찾는다.
도쿄에도 농사꾼 지인이 있다. 출판사에서 주로 과학책을 만들고 있는 오제키(大関) 씨는 야마나시(山梨)에 별장을 마련했다. 도쿄 자택에서 차로 2~3시간에 거리에 나무집을 짓고 주말마다 찾아간다. 후지산을 보면서 온천욕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서 금요일 밤 나도 따라나섰다. 마당 앞 텃밭에는 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것으로 미소시루(된장국)를 맛있게 끊여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성한 무가 없다. 주인 없는 텃밭에서 원숭이가 먼저 무를 뽑아 맛을 본 것이다. 적당히 몇 개 뽑아서 먹고 가면 좋으련만, 영악한 놈들이 뽑아서 맛난 부분만 먹고 던져 버리고, 또 뽑아서 던져 버리고 온 밭이 난리다.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원숭이가 먹고 남긴 덜 맛난 부분을 가지고 미소시루를 끓였지만 그래도 맛있다. 농사꾼은 원숭이가 먹고 남긴 무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한다. 흙을 만지면서 손으로 얻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선윤 백석예술대학교 외국어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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