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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생생한 터키 이야기] 에베소 2 - 사도 요한의 흔적

사도 요한의 외침 '서로 사랑하라'
열정과 냉정 사이에 있었던 에베소

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원소명 기자 |

 

[생생한 터키 이야기] 에베소(Ephesus) 2 - 사랑의 사도 요한의 흔적

 

에베소 1편 참고

 

사도 요한

 

백발이 성성하고 기력이 쇠한 노사도가 에베소의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지는 어느 늦여름에 어두침침하고 허름한 지하 예배실에서 힘없이 빙 둘러 앉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한 마디 말을 내뱉었다. “서로 사랑하라…”

 

체코의 종교개혁자 제롬에 따르면, 사랑의 사도 요한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서 장기간 설교하는 것이 힘들어 졌을 때, 가끔씩 나와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마디씩 권면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했다고 한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할 때마다 온화한 얼굴로 “나의 아들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반복했는데, 항상 같은 말만 반복해서 하니까 에베소 교인들은 식상한 나머지 이렇게 건의를 했다고 한다.

 

“사도님, 왜 똑같은 말씀만 계속 되풀이 하십니까?”라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노사도는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니라”라고 말했다.

 

에베소로의 이주

 

 

AD 190년경 로마의 감독 빅토르(Victor)에게 편지를 보낸 에베소의 감독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와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세비우스(Eusebius)는 AD 60년대 중반의 유대-로마 전쟁 혼란 속에 세베데의 아들 요한(예수의 제자)은 에베소로 이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AD 60년대 중후반 무렵에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살다가 유대 땅을 떠나 에베소에 도착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할 때 옆에 있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요한은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시고 살다가, 바울의 전도활동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소아시아 지방에서 흥왕하게 되자, 바울을 이어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던 디모데의 초빙을 받아 AD 60년대 중후반 경에 노구의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가게 되었다.

 

AD 431년에 있었던 제3차 에베소 종교회의 회의록에 요한이 마리아를 위해 집을 한 채를 지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위 링크 참고)

 

AD 60년대 중반 경에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다가 실패하였는데, 그 후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의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네로 황제는 제국 내에서 인정받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유대 반란 진압’이라는 사명을 주어서 유대 땅으로 파병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군사들이 이스라엘 땅에 다다랐을 때 로마로부터 ‘네로 황제가 자살을 했다’는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원로원에서 네로 황제를 황제의 자리에서 파직하며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는데, 네로 황제는 급히 몸을 피해 숨었지만 조여 오는 군사들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칼로 자신의 목을 잘라 자살을 한 것이다.

 

바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군사들은 유대 반란 진압을 멈추고 급히 로마로 회군해서 황제 자살이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혼란에 빠져있는 로마를 안정시키고 자신이 네로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는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유대 반란 진압’이라는 자신의 임무을 잊지 않고서 자신의 아들인 티투스(Titus) 장군을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병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 포위하고 숨쉴틈 없이 공격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시기에 극심한 기근까지 닥쳐 곤핍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때 전쟁과 기근 때문에 죽은 사람의 수가 110만에 이르렀고, 노예로 팔린 17세 미만의 아이들도 9만이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기근 때문에 자식까지 구워먹는 반인륜적인 행위까지 자행되었다고 하는데, 계곡에 던져진 시체들을 본 티투스가 “하나님, 이것은 제가 저지른 만행이 아닙니다!”라고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와서 정착한 후 에베소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마침내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스룹바벨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운 뒤 유대인 반란군을 진압했다. 예수의 예언처럼 예루살렘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파괴되었다. 이 유대 반란의 패배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것이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에베소에서의 활동

 

 

사도 요한이 디모데를 이어서 에베소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에베소교회는 원래 바울이 AD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로마 제국에 다시 체포되어 순교한 직후 디모데에게 맡겨졌었다.

 

바울 생전에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반했던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목회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 와중에 그는 디모데가 ‘5월 아데미 축제’ 때 축제로 열광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요한이 에베소교회를 맡게 된 것이다.

 

AD 91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를 이어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가 황제의 자리를 이었는데 그는 어느 황제보다 더욱더 기독교를 박해했던 황제였다.

 

초대 황제였던 옥타비아누스 이후로 황제들은 죽은 후에 원로원에 의해서 신(神)으로 선포되었다. 선정을 베풀고 백성에게 인정받은 황제는 죽은 후에 로마 제국을 지키는 수호신들의 목록에 추가되었고, 시민들은 신전에서 죽은 황제의 이름으로 향불을 피우며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다.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와 형도 모두 사후에 신격화되었는데, 이런 영예는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클라우디우스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보통은 황제가 죽은 후에 신으로 선포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이 살아 있는 때부터 신이라고 선포했다. 본인 이름의 ‘도미티아누스 신전’을 만들어서 시민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해서 박해하는데 자신의 신전을 이용했다. 병사들을 시켜서 무작위로 사람들을 신전으로 데리고 와서는 도미티아누스 동상 앞에 경배하며 분향하기를 강요했는데, 끌려온 사람이 경배를 하지 않으며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 기독교인이라고 단정하여 감옥에 가두고 박해를 가했다고 한다.

 

밧모섬 유배

 

 

에베소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던 사도 요한도 도미티아누스 신전 앞을 지나다가 로마 군사들에게 연행되는 일을 당했다. 그러나 황제의 동상 앞에서 경배하기를 거부하므로 다른 기독교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다.

 

사도 요한은 로마로 끌려가서 독배를 마셨으나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고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밧모섬으로 유배시켜 혹독한 채석장의 중노동을 맛보게 했다고 전해진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에베소로의 귀환, 그리고 죽음

 

그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측근에 의해서 암살당했고 요한은 밧모섬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왔다. 그는 밧모섬 유배에서 돌아온 후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제자들을 양육하다가 AD 100년경 9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요한의 시신은 아야술룩 언덕 위에 묻혔고 4세기에는 무덤이 있던 그 자리에 작은 요한 기념교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 작은 기념교회가 있던 자리에 6세기 들어 아야 소피아를 건축한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요한 기념교회를 건축했는데, 십자가 형태의 건물로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안뜰, 현관, 본당, 부속 예배당, 세례장,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고, 본당 제단에는 특별히 복음서의 저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교회 안에는 4세기경에 목조로 지은 작은 예배당과 요한의 무덤이 있다. 예전에 교회로 사용하였던 목조 건물 안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사도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성서의 기록과 에베소교회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신자들을 향하여 ‘모든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잘 알고 있으며,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거짓 사도를 드러낸 것과 주의 이름을 위해 참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잘 알고, 또한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그리고 반면에 ‘너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고 있다.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는 기독교가 출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교리가 명확하게 확정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유난히 이단 사상과 거짓 교훈,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짓 사도들이 많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에베소교회도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다행히도 사도 바울이 개척하여 요한이 주로 맡아 목회하던 교회여서 그런지 에베소교회는 이단 사상과 그렇게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요한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잘했다고 칭찬하였던 것이다.

 

올바른 신앙과 거짓 신앙을 정확히 연구·분석하여서 어떤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며 어떤 신앙이 거짓 신앙인지를 분별하려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차갑고 냉철한 머리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내 편이고, 어떤 사람이 아닌지를 계속 점검하고 감시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거짓 신앙을 정확히 분별하는 것도 중요했고 잘한 일이라고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문제는 에베소 신자들은 머리만 차가워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야 할 가슴마저도 싸늘하게 식어갔던 것이었다.

 

에베소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독교 박해 때 그들이 신앙을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교리적인 싸움으로 신자 간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AD 64년부터 네로 황제는 기독교 박해를 시작했었는데 이 때 에베소교회 신자들은 바울과 신앙을 저버린 일이 있었다(딤후 1:15~18). 이때 어떤 신자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실제로 트로피무스를 비롯해 70여명이 순교를 당했고, 어떤 신자들은 박해의 칼날을 두려워하여 배교를 하기도 했다.

 

에베소교회에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케린투스와 같은 영지주의 이단들의 영향이 그것이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원론을 주장하여 물질세계는 근본적으로 악하고 영적인 모든 것은 선하다고 가르친다. 영지주의에서 파생되어 나온 이단 사상이 니골라 당의 가르침이다. 니골라 당은 극단적 이원론자들로서 영은 선하고 육은 본래 악하다는 전제 하에 악한 육체가 저지르는 모든 행위는 죄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하는 일의 거룩함과 순수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박해와 이단 사상과의 싸움 가운데서 에베소교회는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섬겼을 때의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단 사상과의 치열한 싸움 가운데서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아군과 적군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랑할 사람은 사랑해야 했지만, 사랑과 긍휼, 자비는 없고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만이 번쩍이던 상황이었다.

 

교회는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 같은 이단을 미워하고 그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쟁 속에서는 자칫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신자 간의 사랑도 모두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기가 쉽다. 교회도 극단적인 이원론에 빠져서 악한 것과 선한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내 편 아니면 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틀린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조차 틀리다고 생각하여 구별하고 싸워야 할 적으로 인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교회 내 분열의 아픔을 치유하고 분열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요한일서를 기록했는데, 거기서 ‘사랑’을 강조했다. 그는 죽을 때 까지 에베소교회에서 사랑의 메시지만을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받은 교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사랑과 순수한 복음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 신자들은 지진과 말라리아 병으로, 나중에는 투르크인들의 칼날에 스러져 갔다.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 교회였던 에베소교회는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여 결국은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교회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되고, 지금은 그 흔적만이 당시의 아픔을 간직한 채 여행객을 맞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7,8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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