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에서 20년을 살았다. 10년 전 길을 하나 사이에 두고 거실이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는데 어차피 같은 마을이라 생활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집에 10년씩 산다는 것은 변화변동이 큰 우리나라사회에서는 무능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래도 30~40년 전 졸업앨범에 기록된 연락처로 찾아가면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는 일본 친구들을 생각하면 그리 엄청나게 오래 산 것도 아니다. 집값이 뛰고 내리고,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IMF를 경험하는 20년 동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이사를 왔지만 우리가족은 마치 독수리오형제처럼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새로 지은 주상복합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더 좋은 학교가 있는 마을로 옮기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때마다 내 발목을 잡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천장에 설치한 에어컨을 어떻게 떼고 옮겨야 하나, 안방에 설치한 붙박이장은 어떻게 하나……,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사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가 아플 때마다 쪼르륵 달려가는 송영명소아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는 갈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파트 상가건물 2층 미장원 옆에 자리한 송소아과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첫째가 태어나고 처음 찾아갔을 때 병원 안의 소파가 낡았던 것을 기억하니, 20년 훨씬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미국으로 유학 가는 앞집 따님이 송소아과에 가서 예방주사접종확인서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니 30년 전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 동네 아이들은, 아니 이제 시집 장가갈 나이가 된 젊은이들은 모두 송소아과에서 예방주사를 맞고 감기약을 처방받으면서 자랐다.
아들놈은 1년에 한두번 꼭 열감기를 앓았다. 평상시 잘 아프지 않는 튼실한 놈인데 어쩌다 감기를 앓으면 38도가 넘는 일이 숱했다. 이때마다 등에 업고 송소아과를 향해서 뛰었는데, 병원에 도착해서 포대기를 푸는 것만으로 나도 아이도 안도했다. 딸아이는 천식을 앓았다. 환절기 때 기침을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이 역시 믿을 곳이라고는 송소아과 뿐이었다. 쌕쌕거리면서 지금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아 어미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을 때도 원장님께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아이의 손을 잡고 숨을 길게 내쉬는 연습을 시킬 때 나도 옆에서 따라 숨을 내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우리 아이들이 유아에서 청소년기를 거치는 과정을, 내가 엄마로서 성숙해가는 과정을 원장님은 함께 하셨다. 세탁소 아저씨 목소리를 흉내 내고,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를 부르고, 개다리춤을 추면서 재롱을 부렸던 아이가 이제는 원장님보다 훨씬 큰 키를 하고 배낭여행 가기 전에 맞아야 한다는 파상풍 주사를 맞으러 간다. 원장님 역시 해를 달리하면서 다른 모습들을 보였다. 콧물 뽑는 기계를 들이고는 아이처럼 좋아하시고, 설사한다고 찾아간 우리아이 콧구멍에도 기계를 들이대고 콧물을 뽑았다. 한때는 컴퓨터가 좋아서 독수리 타법으로 뭔가를 열심히 찾고 계셨다. 최근에는 카메라에 푹 빠지신 것 같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들 얼굴을 크게 찍어서 병원 한쪽 벽을 꽉 채우고 있다.
KBS2TV 인기 프로그램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 1주년 특집의 주제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였다. 참 잘 지은 제목이다. 아이는 부모만의 힘으로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필요한지 ‘슈퍼맨’만이 아니라 우리는 잘 안다. 아이들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관계 속에서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존재로 성장한다.
내 삶의 무게조차 버거워하면서 두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 어린이집 선생님은 지금도 우리 아이들의 멘토다. 대학진학에 대해서까지 상담을 했으니 말이다. 자전거방 아저씨는 두발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빼는 그 순간의 감동을 알고 계신다. 슈퍼, 문방구, 빵집 아저씨 아주머니도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만들어낸 ‘비밀’을 알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문방구, 슈퍼 아저씨를 만나면 배꼽인사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호프집 아주머니와 더 가깝게 지낼 만큼 자랐다. 시간을 더 하면서 더 많은 마을 사람들과 만남을 이어갈 것이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축 안전진단 통과’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안전진단을 통과했다는 말은 안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지 않으니 축하한다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우스운 말이다. 이른바 조만간 재개발 가능하다는 뜻이다. 사실 얼마나 더 있어야 재개발이 될지 모르는 일이나 우리 집도, 상가건물도 헐리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설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소중한 만남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고선윤 백석예술대학교 외국어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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