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구약성서 창세기를 읽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6일간은 꼭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랍비들이 이것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습니다. 즉 “어째서 하루가 일몰부터 시작되는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랍비들의 결론은 ‘밝을 때 시작하여 어두워서 끝내기보다는 어두울 때 시작하여 밝을 때에 끝내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둠’보다는 ‘밝음’에 방점을 두고 낙관적으로 살려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담긴 결론인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읽으면 꼭 창세기 1장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창세기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라고 시작하듯, 요한복음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흑암 중에 먼저 ‘빛’(창 1:3)을 창조하신 것처럼, 요한복음에서도 어둠 속에 ‘빛’(요 1:9)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 어둠의 문을 열고 날이 밝아오는 새벽에 부활하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는 ‘빛의 종교’인 것 같습니다.
유기성 목사의 <십자가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보면, 미국의 라비 재커라이어스 목사가 설교 중에 소개한 어느 초등학교 교사가 쓴 시 한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업이 끝났다. 그 아이는 떨리는 입술로 내 책상 위에 왔다.
“선생님, 새 종이가 있나요? 이번 건 망쳤어요.”
나는 온통 얼룩진 종이를 받고 깨끗한 새 종이를 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지친 마음을 향해 속삭였다.
“얘야, 이번엔 더 잘해 보렴.”
하루가 끝났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보좌 앞에 나아갔다.
“주님, 새날이 있나요? 오늘은 망쳤어요.”
주님은 온통 얼룩진 내 날을 받고 깨끗한 새날을 주셨다. 그리고 나의 지친 마음을 향해 속삭이셨다.
“얘야, 이번엔 더 잘해 보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참새들이 재잘대고, 저 멀리서는 까치들도 깍깍거리며 지저귑니다. 아랫마을 아파트 공사장에서는 노동자들의 망치질 소리가 힘차게 들려옵니다.
새날 아침에, 두 손을 하늘로 뻗으며 기지개를 켜는 내게 주님이 속삭입니다.
“얘야, 오늘엔 더 잘해 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