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성장하도록 이끌어 온 순복음의 신학은 오중복음이다.
첫째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을 중심으로 한 ‘중생의 복음’이었다. 중생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성령의 인치심과 인도함으로 성결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중심으로 한 ‘성령충만의 복음’이다. 요한복음 3장 6절, 7절, 말씀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반드시 요엘서 2장 28절, 29절처럼, 하나님께서 말세에 만민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을 받고, 권능을 얻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마가복음 16장 17절, 18절 말씀 “믿는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잡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말씀을 중심한 ‘신유의 복음’이다.
신유복음은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셨기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병 고침을 받는 축복과 다른 이들의 신유를 위해 기도해 줄 의무와 특권이 있다.
넷째는, 축복의 복음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8장 9절.과 갈라디아서 3장 13절, 14절에서 말씀하듯, 주님께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성도들에게 또한 축복을 나누어 주는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다.
다섯째, ‘재림의 복음’이었다. (살전 4:16 / 계 21:1 / 계 22:5)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이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화로운 삶을 영위하게 될 것임을 말한다. 결국 5중 복음은 4차원의 영성(생각, 믿음, 비젼, 말)을 만들어 내었고,
이러한 5중복음(중생의 복음, 성령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과 4차원의 영성(생각, 믿음, 비젼, 말)이 오늘의 순복음 교회는 만들어 내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1958년 3월 15일 신학교를 졸업한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가 그해 5월 18일 서대문구(현 은평구)대조동에 위치했던 최자실 전도사의 집 거실에서 가정예배의 형태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서 시작했다. 교회 창립예배를 드리던 날 최자실 전도사는 이른 아침부터 사과 상자에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을 만들고, 온동네를 다니며 예배를 알렸으나, 결국 창립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조용기 전도사, 최자실 전도사, 그의 3자녀들과 밭일을 하다가 비를 피하려고 온 할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가 시작되고 1개월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7년 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의 말을 듣게 된다. 무성이 엄마란 이 여인은 7년 전 아이를 출산한 이후 중풍병을 앓게 되었는데, 한번도 자기 발로 일어선 일이 없었다. 두 전도사가 처음 이 집에 들어갔을 때에는 악취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아이들은 더럽기가 한이 없었다. 그리하여 최자실 전도사는 아이들과 병자를 물로 씻긴 후 조용기 전도사와 함께 무성이 엄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중풍병은 나을지어다."
조용기 전도사는 목청껏 호령했고, 몇 시간을 기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성이 엄마가 벽을 잡고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걷기 시작했고, 이때, 중풍병에서 완전히 고침을 받았고 건강한 몸으로 일어선 것이 교회의 발전에 첫 출발이 되었다.
이처럼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의 피땀어린 기도와 헌신의 결실로 인해 성도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해 집에서 드리기가 비좁아서, 다음해 봄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집 앞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바닥에 깔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후 천막교회는 부흥해 더 큰 천막을 구입해 천막을 교회를 넓혀 가는 일을 계속하였다.
조용기 전도사가 탈장으로 인해 대수술을 받고 군에서 전역한 후, 교회는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군에서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9월 1일, 서대문 로타리 서커스단이 자주 머물던 터에서 천막 대부흥성회가 열렸다. 이 부흥성회의 설교자는 샘 토트 목사였고 조 전도사가 통역을 맡았다.이 부흥 성회는 거대한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서울 전역으로부터 몰려들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병자들이 성령으로부터 오는신유를 경험하였다. 부흥성회 기간 중,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서대문에 교회를 개척할 것을 결심하였다.1961년 10월 15일 부흥회가 열린 장소에 교회가 세워졌고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는데, 이곳이 순복음부흥회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서대문부흥회관은 황성수 변호사의 변호를 필요로 하였다. 그의 지혜롭고 열심있는 변호로 인하여 서대문 부흥회관의 건설은 그 다음 해에 완공되었다.
조용기 전도사는 1962년 4월 26일 목사 안수를 받게되었다. 그리고 그해 5월 13일 순복음부흥회관의 명칭이 순복음중앙교회로 바뀌게 되었고, 이 무렵 교회 성도가 5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후 3년 후인 1964년 서대문 개척교회는 3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같은 해 조용기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초청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는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영어로 설교하고 또 한국을 멋지게 소개하면서 순회 선교여행을 했다.
서대문 교회는 나날이 폭발적으로 부흥을 거듭하였다. 성도수가 만명을 초과함에 따라 서대문 교회는 더이상 성도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교회는 새 성전 건축을 위한 부지를 찾기 시작하였고, 이때 여의도가 추천 되었는데, 그 당시 여의도는 단지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로 이용되는 땅이었다.
그 당시 여의도는 황폐한 섬으로서,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조차도 없었다. 교통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고 여의도에 건물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강하게 추진하였고,
마침내 교회는 여의도에 부지를 구입하게 되었고 건축이 시작되었다. 건축이 시작되자 교회는 자금 문제에 봉착. 중동 오일쇼크의 여파로 달러에 대한 원화의 가격이 하락해 건축 자재의 가격이 상승하였고 교회 헌금도 감소하게 되었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중동 오일 쇼크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은행이 교회에 신용한도를 줄임으로 인하여 부채의 압박은 더욱 가중되었다. 결국 교회의 건축이 완전히 멈추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왔다.
조용기 목사는 매일 밤, 공사 도중 멈춘 녹슨 철골을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차라리 이 녹슨 철근이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비오는 날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닥에 깔린 쌀가마니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곤 하였다. 이때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기 시작. 성도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교회는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었고, 오늘의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1973년 8월 19일 현재의 여의도에 있는 성전에서 최초의 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 1973년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5만명의 한국성도와 5천명의 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본 성전과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9월 23일에는 18.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롭게지어진 여의도 성전의 헌당예배를 봉헌했다. 이때 비로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계속해서 부흥하여 오늘의 여의도순복음 교회를 이루어 낸 것이다.
이제 계속해서 순복음교회의 성령 사역은 앞으로로도 기독교 부흥에 큰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성령 사역으로 부터의 시작이기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