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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이성용 회장 수안보파크에 있는 ‘ 성봉채플 ’찾아서’

신학적으로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성경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르치심, 그분의 대속적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목사님은 성경의 원리에 충실한 전달자였습니다. -이상직교수 말씀 중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부활신앙을 가지고 신앙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얼마 전, 필자와 홍은익(용암교회)목사는 충주시 수안보 성봉채풀을 찾아 기도하고 돌아오는 시간을 가졌다.

 

성봉채풀은 우리나라 기독교 부흥에 큰 역할을 감당하셨던 성결교단의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채풀. 교회이다. ‘성봉채플은 수안보파크 호텔에서 내려오다 보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성봉채풀‘은 막내 따님이신 이의숙 권사가 아버지 이성봉 목사의 선교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 수안보에 아담하게 세워 놓았다.

 


                                     살아 생전의 이성봉 목사

 

필자는 한국뉴스신문 CEO/회장으로서. 지금부터 10년 전, 따님 이의숙 권사님을 만나 이성봉 목사에 대해 리서치하여, 한국뉴스신문에 기사화 한 적이 있고, 10년 후, 기독교 초기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의 신앙. 부흥 사역에 대해 미션 난에, 한국뉴스신문에 특집으로, 고인이신 이성봉 목사의 삶을 기사로, 실었다.

 


 

-故 이성복 목사님의 목회 철학과 부흥운동에 대해 소개하다.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력은 초교파주의, 철저한 회개와 순종, 하나님과 동행하는 순례자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교파주의가 난립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과 그를 통하여 회심하고 헌신한 200여 명의 목회자들의 활동을 보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교회 등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해방 전에, 그는 만주에서, 일본에서, 그리고 해방 후에는 미국까지 건너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이성봉목사는 민족과 교회가 살길은 영적 각성에 있다고 보았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철저한 회개와 순종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의 부흥 운동은 언제나 회개의 눈물과 변화와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때 폭력단을 이끌었던 상이군인 출신 이천석 목사의 회심은 그 한 예이다. 그가 가장 강조하던 말은 “순간순간마다”라는 말이었고,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말이었다. 그는 임마누엘 하나님 즉 매 순간순간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했다.

 

그는 죄지을 시간을 갖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갔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하고, 하루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부흥 운동의 기초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었다.

 

 

-6.25 동란을 전후하여 인민군의 기독교 탄압과 이성봉 목사에 대해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목포에서 6.25를 맞았다. 성도들을 돌보다가 도피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는 결국 공산당 보위대에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공산당 간부와의 대화를 통하여 그들을 감화시킨다.

 

회개하지 못한 민족을 공산당이라는 방망이로 벌을 주신 것이 6.25라고 표현했고, 은행지점을 보면 은행 본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 자신의 마음에 이루어진 천국지점이 있는 것을 보아 천국 본점이 분명히 있다고 불같이 토로하던 그를 보고 공산당 간부가 데리고 나가 공중에 총을 쏘고 죽인 것처럼 위장하여 도망갈 기회를 주었다.

 

그는 섬을 돌면서 전도했고, 나환자들이 있는 소록도에 가서 자주 복음을 전했다. 유성의 고아원은 그가 단골로 방문하는 곳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참사랑 만이 공산당을 이기고, 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이성봉 목사님이 1955년 서울 신촌에서 신촌성결교회를 개척하셨는데, 그때 생활은? 사모인 이은실 사모님도 매우 신앙심이 깊었다고 하는데, 그 분은 어떤 분이셨는가?


=이성봉 목사님은 12,3평에 불과한 신촌 자신의 집에서 주일학생들과 동네 어른들을 모아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체부동교회의 도움을 얻어 신촌 로타리에 교회부지를 사고 천막교회, 벽돌교회를 짓고 잠시 목회하다가 다시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1일 1교회 순회 부흥집회에 나가셨다.

 

하루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의 열정은 그 후 신촌교회 부흥으로 이어졌다. 그 분은 부흥회 사례금을 농촌교회와 가난한 목회자들에게 대부분을 헌금하시는 이성봉 목사님을 불평 한마디 없이 자녀들을 혼자 키우셨다.

 

세 따님은 그 후 성장하여 첫 딸은 성결교회의 모범적인 목회자인 정승일 목사님과 결혼하였고, 둘째 따님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교수이셨던 박일철 박사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막내 따님 이의숙 권사님은 한국도자기 회장이신 김동수 장로님과 결혼하여 물질적 축복도 받으셔서 선교사업과 봉사를 위해 애쓰고 계신다.

 

이성봉 목사의 부인 이은실 사모님은 기도의 어머니로 알려진 분이시다.

그 분은 틈만 나면 기도로 살아오셨다. 또한 검소한 삶이 몸에 배신 분이셨다. 뜨개질을 잘 하셔서 친지들에게 비싸지는 않지만 정성어린 선물을 자주 하셨다. 불철주야 복음만을 전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셨던 남편으로부터는 인간적인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 분은 남편의 울타리가 되셨다. 기도의 울타리, 묵묵히 자녀들을 볼보시던 울타리가 되어 참으로 순결하고 고결한 삶을 사셨던 분이셨다. 그 분은 오래 장수하시다가 자녀들 특히 막내 사위이신 김동수 장로님 댁에서 아들 이상의 효도를 받으시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비록 남편 사랑은 많이 받지 못하셨지만, 그 분은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셨고, 남편의 울타리가 되어 훈훈한 가정을 이루신 분이셨다.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사역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 얼마나 된다고 생각되는지?

 


 

=그의 설교와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영생의 축복을 받는 놀라운 복음의 요체를 알기 쉽게 소개하였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한 죄의 회개를 촉구하였고, 목회자들에게는 매 순간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순교자의 길, 순례자적 리더십의 전형을 가르쳤다. 그 분의 설교는 매우 쉬웠다. 그러나 감동적인 예화와 극적 효과까지 가미한 매우 대중적인 설교였다.

 

그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분이셨다. 돈, 이성, 권력에서 자신을 이긴 사람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그 분은 강조했다. 한국교회에서 그는 영혼구원 중심의 부흥 설교의 전형을 제시했고, 열정과 순수함, 그리고 도덕적 순결, 그리고 순교자적 리더십을 제시하여 수 많은 목회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국기독교 부흥운동 100주년이 지나 올해 109년을 맞은 이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하신 부흥 사역과 정신이 현재 한국의 교회가 다시 부흥하게 하는데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 분의 어떤 정신과 신앙인지? 필자가 볼 때, 이성봉 목사님의 사역이 얼마나 신학적이며, 왜(Why), 무엇(What)때문에 ‘성경적이다’고 생각하시는지를 설명.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목회자의 리더십의 문제이다. 지나치게 현실적이며 영적 감화력보다 인간적 매력을 더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면 결국 영적 리더십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이성봉 목사님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목회자의 리더십인 것 같다. 매 순간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목회자들이라면 한국교회는 곧 깨어 날 수 있다. 신학적으로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성경적 메시지다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르치심, 그 분의 대속적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이성봉 목사님은 이런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전달자였고, 성경의 원리에 충실하였다. 그 분은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이신칭의를 굳게 믿었고, 존 웨슬리가 전했던 성결의 복음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그의 부흥회는 방언이나 신유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부흥회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영적 은사를 경험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한 청년은 누워서 이성봉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병 고침을 받고, 나중 목사님이 되셨고, 그분의 아들 사형제가 다 목회자가 되었다.

 

사회 정치적인 개혁을 위해서 그 분은 설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비판가들도 있으나, “양심혁명이 곧 사회혁명이다”라는 공산당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진술했던 말씀의 핵심은 신앙이 문화화 되고, 정치화 되고, 돈벌이에 이용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한 말이었다.

 

그렇다. 경제적으로 풍요하게 되는 것은 믿음의 결과일 수는 있으나, 그것 자체가 복음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삶이 더 축복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의 본질을 이성봉 목사님께선 타협 없이 제시한 분이셨다.

 

-한국 교계에는 이성봉 목사님이 훌륭한 부흥사로, 그리고, 선교사로 알려져 있는데 이성봉 목사님은 어느 쪽이며, 어떤 목회 철학을 가지고 목회를 하셨다고 보는지?

=선교는 그 분의 사역의 목적이었고, 부흥운동은 그 형식이었다. 국내 뿐 아니라, 만주와 일본을 넘나드는 전도를 하셨고, 그 분의 전도는 부흥운동이라는 형식을 거쳐 효과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대에 그 분은 몸으로 순회하는 전도자였다. 그리고 그 분은 라디오 방송매체를 이용하여 그 당시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천로역정이라는 드라마 성격의 설교를 전국에 내보냈다.

 

그는 무디와 생키를 합해놓은 전도자였다. 무디는 설교하고, 생키는 찬양을 통해 부흥운동에서 협력하던 패턴을 혼자서 일인이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의 찬양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한국최초로 일본에서 레코드 취입까지 했던 일화가 있다.

 

끝으로 전 호서대학원장. 부총장을 역임한 이상직 교수를 만나, 한국도자기 김동수 회장과 고인이 되신

이성봉 목사의 막내 따님이신 이의숙 권사에 대해, 선교사역에 대해서 들어 보았다. 이상직 목사는 말했다.

 

                                    군 부대 방문 집회후

 

“저는 김동수 장로님과 이의숙 권사님의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고 2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3개월 신촌교회에서 목회 겸 부흥집회를 인도하실 때 같은 울타리에 살며, 목사님의 사랑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통해 은혜 받고 개인적으로 안수기도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런 관계 때문인지, 이 권사님께서 제가 미국 유학 중 장학금을 많이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제가 봉직하고 있는 호서대학교에 장학금을 보내 주십니다. 서울신학대학 이사장으로 계실 때 김동수 장로님께서는 대학발전을 위해 기념관 건립을 위해 한몫을 하셨습니다.

 


                              이성봉목사 설교모습 그림

 

이의숙 권사님께서 성봉선교회를 조직하시고, 손수 일하고 장사하여 번 돈을 모아 미자립 교회와 대학 등에 장학금을 보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그 분들의 신앙에 감동을 받습니다.

 

유혹도 많이 받으셨을 텐데,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묵묵히 사업가로 정진하시는 김동수 장로님과 하루도 쉬지 않고 직접 그릇을 포장하시고, 파시는 이의숙 권사님, 장사 잘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이익을 남겨 하나님 사업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들의 고백을 매우 사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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