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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조선왕조 6백년의 정궁 '경복궁'

"무학 대사의 풍수지리학이 점지한 정궁“ 대한민국 홍보대사 박복신 회장은 말한다.

 


   한국뉴스신문 .  인사문화연구원  박복신 회장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문화유산 탐방 여행은 즐거움 그 자체다. 민족의 숨결을 느끼고 우리 문화의 진수를 배우는 문화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이라고 해서 굳이 멀리 떠나는 여행만이 여행은 아니다.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 오월 고궁을 찾아 고목과 어우러져 전통의 미학이 숨 쉬는 문화재를 감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서울의 고궁 답사 두 번째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강녕전, 경회루 등을 관람하고 향원정 연못 앞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아름다운 고궁의 정자를 감상해 보자. 날씨가 화장한 봄날이어서 많은 관람객이 붐볐다. 견학 온 어린이들과 외국인 관람객이 매우 많았다. 흐뭇함을 느끼면서 어린 학생들이 우리 문화와 문화재에 보다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고궁이라는 생각되어 아름다운 고궁의 현장을 본지 한국뉴스신문에 담아보았다.

 


 경복궁(사적 117호)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다섯 개의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정궁으로 조선의 개창자인 태조 이성계가 1394년(태조 3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떠나 한양을 새로운 나라의 터전으로 잡은 후 새 왕조의 궁전으로 1395년에 지은 것이다. 당시 한양 천도는 태조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고려 신하와 구 귀족들의 본거지 개경을 떠나 새로운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천도였기 때문이다. 한양은 조선왕조의 새로운 기반이었고, 따라서 경복궁은 중요한 만큼 심혈을 기울여 터를 정하고 지은 것이다. 이렇게 지어진 경복궁의 역사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1553년 큰 화제로 불에 타고 다시 임진왜란(1592)때 방화로 타 버린 후 250년가량이나 방치되었다가 1865년 고종이 왕이 되면서 권력을 잡게 된 흥선대원군이 외세에 의해 무너져 가던 나라의 기강과 왕조의 복구를 꾀하며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다시 짓게 된다. 이렇게 지은 궁궐은 얼마 사용하지도 못하고 다시 아픈 역사를 밝아야 했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을 속국으로 삼았고,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의 전각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6년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앞에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짓고, 이듬해에 정문인 광화문을 철거함으로써 경복궁의 제 모습을 완전히 잃게 했다. 경복궁의 복원은 1990년부터 추진되어 강녕전, 교태전, 비현각 등이 건립되었으며, 1996년에는 일제의 잔재 제거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흥례문을 복원(2001)했고, 근정전은 2004년 보수공사를 마치고 웅장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경복궁은 경내가 장방형에 가까우며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 북쪽에는 신무문이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내의 아미산과 향원정 주변은 자연과 인공적인 건조물을 조화시킨 전형적인 궁중 후원이며 근정전, 경회루와 연못은 그 웅장한 규모에 압도당할 정도다.

 

경복궁의 건물배치를 보면 먼저 궁궐 담장문인 광화문(도로와 인접한 문)을 들어서서 홍례문(조선총독부 자리), 근정문 등 3개의 문을 지나야 근정전이 나온다. 그 뒤로 사정전, 강년전, 교태전, 아미산, 집경당.함화당, 향원정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왼쪽은 수정전, 경회루가 오른쪽은 자선당, 자경전이 배치 돼 있다.

 

경복궁 근정문과 행각

근정문(보물 812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근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원래는 한 칸 복도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2칸 복도로 만들었다.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며,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과 월화문이 있고 북행각 가운데에 사정문이 있다.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융무루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궁 정전의 남문 중 하나 밖에 없는 2층 건물로 위엄을 갖춘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

경복궁의 중심이 되는 정전이다. 최근 수년에 걸쳐 보수공사를 끝내고 새 단장을 한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절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갖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됐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조선의 고유 건축양식인 팔작지붕이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 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 건축이다.

 

아! 경복궁 '경회루' 그리고 잉어 떼

 

봄철이 되면 산란기를 맞은 경회루의 잉어 떼가 야단을 떨며 연못 구석구석을 헤치고 다니는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이 경회루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다. 연못에는 금붕어를 비롯한 잉어 등 여러 어종의 물고기가 물살을 가르며 관람객의 눈길을 유혹한다. 수백 년 된 수양버들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멀리 북한산과 마주하는 눈 맛은 시원함을 더해 준다.

 

경복궁 자경전

자경전(보물 809호)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인 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자경전은 대비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잠을 자는 침전 건물로, 총44칸 규모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이라는 침실을 두고 중앙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 또 동남쪽에는 다락집인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했다. 주변에는 수십 개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 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정궁이라 할 수 있는 건물로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이다.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교태전 바로 뒤에 있는 아미산의 굴뚝(보물 811호)은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했다.

 

아미산의 굴뚝은 모두 6기로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동.식물 무늬를 조화롭게 조각했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했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했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써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되고 있다.

 

아름다움의 절정 '향원정'

정전의 맨 뒤편에 청와대와 지근거리에 있는 향원정은 호수 위 정자의 묘미를 한층 더해 주는 아름다운 정각이다. 경회루가 남성적이라면 향원지는 아늑하고 매우 여성적이다. 이곳은 왕실 전용의 휴식 공간이었다. 향원지의 모습도 역시 경회루와 마찬가지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지만 끝 모서리가 둥근 부드러운 사각형이다. 향원지도 연못 한 가운데 네모난 섬을 조성하고 그 섬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향원정이라 했다.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는 뜻이다. 정자는 둥근 섬 한복판에 네모난 기단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나지막하게 세운 다음 2층 누각으로 꾸몄다.

 

향원정은 취로정이라 불리던 정자를 1873년 건청궁을 지을 때 다시 손을 본 것으로 정자로 연결된 다리를 '취향교'라 하는데 이것도 지금과 달리 건청궁이 있었던 북쪽으로 나 있었다. 이 취향교는 6·25전란으로 불타 없어졌고, 지금의 남쪽으로 난 다리는 1953년에 만들었다. 이 때 건청궁이 없으니 그리로 놓기보다는 편의를 위해 남으로 냈다. 향원정은 사계절 구별 없이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특히 단풍든 가을의 풍광은 가히 신비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

 

한편 지금까지 경회루가 일반에 개방이 되지 않았었는데, 지난 2005년 6월 1일부터 동절기를 제외한 매일 3회에 걸쳐 단체관람을 해왔다. 문화재청은 국민들의 문화유산 접근성을 높여 문화체험과 활용을 통한 목조건축 보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경회루를 일반인에게 특별 개방해 왔다.

 

             건청궁 모습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 당한 비극(을미사변)의 현장 경복궁 건청궁이 약 100년 만에 복원돼 됐다. 문화재청은 2004년 6월18일 공사에 착공하여 2007년 10월 20일 완공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건청궁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을 선언했던 1873년 건립됐다. 이곳은 1887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등 고종이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머물던 곳 이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건청궁 내 옥호루 주변에서 시해되고,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로 남은 뒤 1909년 헐렸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물들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 철거되었고, 이 자리에 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다가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번에 복원된 건청궁은 대지 약 1000평에 고종의 침전이었던 장안당, 명성황후의 침전이었던 곤녕합 등 14개 건물(연건평 296평)이 포함돼 있다. 건청궁은 1873년 고종이 조성한 궁궐 속의 작은 궁궐이다.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간섭을 피하는 동시에 정치적 독립을 꾀하기 위해 고종은 일부러 경복궁의 북쪽 깊숙한 곳에 독립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서울 중구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아관파천), 건청궁은 그 뒤 방치되다 1909년경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청궁 건물들은 사대부 양반가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은 것이어서 단청을 하지 않는 양반 가옥의 전통을 그대로 살렸다. 건천궁을 관람은 인원 제한 때문에 경복궁 홈페이지에 신청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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