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연합 (아이타임즈M 월간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연구하면서 나는 그 무엇보다도 감각적 예배 체험에 더 마음이 움직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말하는 감각이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오감을 가리킨다. 기독교의 모든 예배를 단지 지적 동의로 전락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절름발이 신세로 몰아넣는 것이다. 감각을 사용할 때-감각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 아닌가-전혀 새로운 예배의 장이 우리 앞에 열린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주 요란하고 화려하게 임하실 때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요란하고 화려한 하나님
하나님의 천국 영광에 대한 성경기사들은 아주 수려할 뿐 아니라 최소한 조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 예로 에스겔이 기록한 체험을 생각해 보라. 그는 폭풍을 느낀다.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는 것이 보인다. 그는 크게 울리는 소리와 요란한 물살 같은 날개 소리를 듣는다. 에스겔은 이어 하나님의 명에 따라 꿀 같이 단 두루마리를 먹는다. 다 끝난 후에도 에스겔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채-감각의 맹공이 너무 강했으리라-충격 속에 앉아 7일을 보낸다.
에스겔서 10장에서도 비슷한 출현이 나온다. 에스겔은 불타는 숯불, 영화로운 광채, 요란한 소리, 성전에 가득한 구름, 신기한 광경과 동작-황옥처럼 빛나는 바퀴, 네 얼굴의 그룹들을 경험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요한계시록의 경험도 매우 감각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자 요한은 그것을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라 묘사한다. 예수님의 머리와 털은 ‘희가 흰 양털 같고...그의 눈은 불꽃같고’ 예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해를 쳐다보려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햇빛이 너무 밝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안다. 바로 요한이 그랬다. “내가...그 발아래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미적 감각의 유익
금세기 초에 활동한 본 오그던 보그트(Von Ogdon Vogt) 목사는 미와의 만남과 하나님과의 만남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미는 겸손을 유발한다. 둘째, 우리를 굴욕에서 존엄으로 데려간다. 셋째, 다른 세계관을 낳는다. 넷째,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낳는다.
물론 이런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을 만나면 도덕성이 높아지며 적어도 그래야 마땅하지만 미에는 그런 결과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아에 대해 죽는 길로 부르지만 미의 추구는 이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미의 네 단계에는 회개, 정결케 됨, 깨우침, 헌신으로 이어진 이사야의 소명이 반영되어 있다. 미 없는 기독교는 현실과 유리된 머리 속의 종교가 된다.
감각을 깨운다
1) 청각/예배에 음악을 사용하라는 성경의 권고는 놀랄 일이 못된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언어와 음악이 합해지면 언어만 있을 때보다 두되에 더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아신다. 아주 현실적 의미에서, 회중은 설교 때보다 특별 음악 순서 때 더 ‘살아 있을’ 수 있다. 가르침은 잊어버려도 노래 가사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위대한 작곡가 헨델은 자신의 표현으로 ‘초월의 코드’를 감지했다. 샤프가 5개, 7개, 8개 붙은 코드라면 그는 모든 천국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특정 코드를 사용해 다양한 느낌을 살려냈다. 즉 긴박감이나 질투심을 그릴 때는 G단조, 애틋하고 구슬픈 느낌을 만들어 낼 때는 E단조, 밝은 햇빛과 푸른 초장이 연상되는 분위기를 살릴 때는 G단조, 그리고 침울하고 낙심된 느낌을 유발할 때는 F단조를 사용했다.
루터는 성경이 본래 읽기보다는 듣도록 된 책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가장 잘 변화되고 도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의 통찰의 타당성이 과학으로 입증되고 있다. 성경을 그냥 읽기보다는 읽혀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은 더 활성화 된다.
2) 후각/하나님은 모세에게 향품의 헌물을 모아 냄새 좋은 향을 만들라고 명하셨다.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피워야 했다. 향기로운 향을 만드는 구체적 지침은 출애굽기 30장에 나와 있다. 아기 예수에게 드려진 예물 중에도 유향이 있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는 분향하던 중 천사의 방문을 받고 자기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전갈을 들었다. 시편 141편 2절에는 향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끊임없이 올려진다. 성경에 분향의 부정적 사례도 등장하지만 그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된 경우이거나 타락한 신앙 속에 드려진 경우다. 거부된 것은 향의 오용이지 사용 자체가 아니다.
동방정교회의 공 예배에는 향이 빠지지 않는다. 일부 루터교회와 감독교회는 향을 사용하지만 장로교회에서 향을 보기는 힘들며 침례교회에서는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향의 사용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3) 촉각/언젠가 나는 고간주간에 주머니에 못을 하나 넣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못이 고난주간 내내 내게 회개와 중보기도를 일깨워 주었다. 손으로 못을 만지거나 아니면 몸을 구부리다 다리에 못이 느껴질 때마다 그 뾰족한 끝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시켜 주었다. 촉각은 커뮤니케이션 통로다. 감각주의 영성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그렇다.
정교회 예배에는 입맞춤이 자주 있다. 그들은 십자가, 제단, 거룩한 기명 등에 입 맞춘다. 입술을 대는 것은 대상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길이다. 그것은 밖으로는 물론 안으로도 강력한 고백이 된다. 언젠가 다락에서 나는 우리 큰 딸이 아기 때 입었던 옷들을 넣어둔 상자를 꺼내 보았다. 그 특별했던 시절의 기억이 물밀 듯 밀려오자 어느새 나는 옷가지 하나를 눈앞까지 들어 올려 거기에 입 맞추고 있었다.
내 가장 못 잊을 기도시간 중 하나는 자연스레 찾아 왔다. 당시 젊은 대학생이었던 나는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다. 무의식중에 나는 몸의 각 부위를 만져가며 하나님께 나를 바쳤다. 우선 나는 손가락과 발을 만지며,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쓰이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손을 내밀 때마다 사랑으로 내밀고 싶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하고 싶습니다.” 다음 입술에 손을 대고 기도했다. “입을 뗄 때마다 진실하게 하시고 아버지 나라에 영광이 되는 말을 하게 하소서.” 이어 눈을 만지며 기도했다. “제 눈을 잘 간수하게 하소서. 속사람에게 유익한 것만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진정 도움이 필요한 주변 상황에 제 영안이 눈멀지 않게 하소서.” 그런 식으로 여러 신체 부위를 하나님의 도구로 바쳤다.
4) 시각/시각에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클 것이다. 우리 대뇌피질의 자그마치 3분의 1이 시각 처리에 할애된다. 그 정도면 인간 두뇌의 최고 수준이다. 연구진들은 시각의 활용으로 의지에 영향을 입힐 수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기독교 예배와 기도에 시각이 사용된 것은 성육신에서 기원한다.
본 오그덴 보그트 목사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실내장식을 보면 재미있다. 조목조목 반드시 꼴볼견은 아니지만 남다른 탁월함이 없다. ...원하든 원치 않든 건물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 비효율적 영향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일 중 하나다.” 그는 건물을 지나치게 편안하게 또는 지나치게 냉랭하고 단졸보게 꾸며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위대한 건축가들은 안정감(신앙의 충족성의 상징), 조화와 평화, 간소함(육체의 절제를 일깨움), 온화함, 밝음 등의 긍정적 분위기를 혼합할 줄 알았다.
5) 미각/미각은 기도에도 사용될 수 있다. 단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연상시킬 수 있고, 쓴 것은 응답이 없는 듯한 기도를 꾸준히 지속하게 해줄 수 있다. 맛과 예배가 연결되도록 우리 자신을 조건화 한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예배를 떠올릴 수 있다.
감각주의 영성의 유혹
1) 알맹이 없는 예배. 2) 미의 우상화. 3) 예배를 예배함을 든다.
▶사진 설명 2 청주온누리교회 이성용 목사. 케리토마스의 영성 이해는 다양한 리더쉽으로 이끌어가는 사회속에서 이 시대를 열어가는 최고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 ㈜한국미디어그룹 회장 말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