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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를 울리는 백마의 말굽 소리

태몽은 단순히 임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태어날 아이의 전 생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주 구체적으로 아이의 직업에서부터 보유할 재산까지 알려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전체 삶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려주는 태몽. 이번 호에서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평생을 서민의 편에 서서 살다간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을 되돌아본다.
 
“백말이 말뚝에 매어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고 했어. 엄청나게 큰 말이 발굽을 내딛는데 그 소리가 우렁찼지”
 
말(馬)이 관련된 태몽은 아이가 장차 정치나 사업 분야에서 뜻을 이룰 수 있는 정치가나 경영자가 될 것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 백마는 아름다운 사람, 단체·권력을 의미하며 특히 야성적이고 힘찬 백마는 두각을 드러내는 귀한 인물을 상징한다. 천지를 울리는 백마의 말굽 소리. 태몽이 암시한 것처럼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정 많은 사람에게 큰 울림을 주고 떠난 우리 시대 위대한 정치가였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
경남 김해군 진영읍 과수원집 막내로 태어난 그는 6살 때 천자문을 깨쳐 주위에서 ‘노 천재’ 소리를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성적은 국어 99, 산수 98, 보건 96, 음악 95점. 평가 란에는 ‘교과 성적이 우수하고 특히 발표력이 있음. 통솔력이 있어 급우 선도의 자진 노력이 있음’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결석이 잦고 자주 병치레를 했던 것도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히 여기며 자랐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75년 고시에 합격해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으나 7개월 만인 78년 5월 변호사로 개업한다. 그는 상고출신으로 회계에 밝다는 장점을 발휘해 부산지역에서 조세전문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러던 그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81년 부림 사건이다. 그는 이 변론을 준비하면서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경찰에 구금돼 온갖 고문을 당한 이들을 접견한 뒤 받은 충격을 이렇게 적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도 믿으려 하질 않았다. 분노로 인해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그는 86년부터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단하다시피하고 시국사건과 민주화운동에 매달렸다.
87년 6월 항쟁 당시 그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나섰다. 그해 9월에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사건에 뛰어들었다가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되며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는다.


 
신념의 정치가 만든 바보 노무현
인권 변호사로의 투쟁은 부산에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로부터 정계입문 제의를 받고 당시 민정당 실세인 허삼수 후보가 출마한 부산동구 공천을 요구했다. 모두가 피하는 거물 정치인과의 대결에서 그는 ‘가자,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선거 구호를 내세우며 승리, 본격적인 정치가로의 삶을 걷는다.
그의 선동가적인 기질은 88년 5공 청문회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특유의 공격적이면서 논리적인  질문으로 온 국민의 귀와 눈이 집중됐던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주도한 3당 합당을 거부한 그의 정치역정은 급물살을 탄다. 그는 14대 총선과 부산시장 선거, 서울 종로에 연속해 출마하지만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하고 거듭되는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99년 7월 종로 보권선거에 출마해 6년 만에 국회에 입성하지만 이듬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만 결과는 실패. 하지만 그가 보여준 신념의 정치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태동의 계기가 되기에 이른다.
 

백마의 말굽 소리가 천지 울려
그는 천지를 울리는 백마가 되었던가. 태몽은 말한다. 엄청나게 큰 말이 발굽을 내딛는데 그 소리가 우렁찼다고. 그는 2001년 대통령 경선에 출마, 돈도 조직도 변변찮음에도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도입된 국민 참여경선제에서 노사모가 주축이 된 노란 물결을 일으켜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다. 마침내 그는 2003년 2월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취임 1년 만에 야당에 의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며 이는 전국을  탄핵 반대 촛불 시위로 들끓게 만들었다. 참여정부 5년 내내 그는 보수 언론과 야당에 의해 공격받은 대통령이었지만 권위주의의 옷을 던지고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한 서민의 대통령이었다. 퇴임 후 고향 봉화로 내려가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자했지만 역사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전직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슬프고도 서럽게 온 국민의 마음을 울렸다. 500만 명이 넘는 조문 행렬은 문자 그대로 천지를 울리고 또 울렸다. 그렇게 ‘바보 노무현’은 큰 울림을 주고 우리 곁을 떠났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돈 잘 버는 변호사의 지위를 이용해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지만 백마가 암시하는 것처럼 두각을 드러내는 큰 정치인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비록 지금은 우리 곁에 없지만 그가 정치가로서 보여준 이상과 용기는 분명 천지를 울린 백마의 말굽 소리가 아니었을까.

김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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