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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회 평북노회 성황리에 마쳐

평북노회장 김경호 목사, "주의 행하신 일을 나타내소서" 설교

 

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 평북노회(김경호 노회장)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제대로 열리지 못하다가 지난 17일과 18일 동안교회(김형준 담임목사)에서 제 214회 평북노회를 개회하여 진행하였다.

이날 노회는 출석인원 558명으로 목사 및 장로 모두 재적의 과반수를 충족하여 노회장이 개회됨을 선언하였고 청원 안건들을 처리해 갔다.


봄 노회에서 선출된 제108회 총회 총대는 다음과 같다.

 

목사총대-이순창, 김경호, 김신일, 권호임, 김후식, 한명석, 전세광, 황인돈, 이제학, 조양구, 강석보, 방수성, 박영철, 안영표, 유우정, 이길원, 정해우, 김창근, 한영주(19명)

 

장로총대-조현동, 주길성, 조정수, 홍배식, 엄기원, 최기열, 박흥조, 김명수, 안상권, 김덕수, 박종태, 김진국, 김희백, 윤원균, 석문홍, 박남규, 신승하, 조순연, 송경희(19명)

 

이날 개회 예배에서 평북노회장 김경호 목사는 "주의 행하신 일을 나타내소서"란 주제의 설교를 통해 평북 노회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우리 노회의 역사와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 희망찬 미래를 열어갈 것을 강조했다.
 

한편, 약 37년 동안 평북노회 직원으로 근무한 김은정 사무장이 은퇴하게 되어 감사패와 은퇴 선물을 증정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동안 평북노회 노회장을 역임한 증경노회장들에게 감사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214회 평북노회 설교 (설교자 : 노회장 김경호목사)

설교 제목 : 주의 행하신 일을 나타내소서

성경 본문 : 시편 90:1~2, 16~17

 

 

△ 아래는 설교 내용.


평북노회가 시작되는 역사를 보면 1912년 9월 1일에 총회가 조직되고, 이에 앞서 1912년 2월 15일 평북 선천읍 남교회 예배당에서 제1회 평북노회가 열려 평북노회조직회장 노세영(Cyril Ross) 선교사가 창립취지를 설명하고 회장에 위대모 선교사, 서기 정시정 목사를 선출하는 한편 7개 시찰로 나눠 오직 복음 전파에 힘써 한국교회의 예루살렘으로 호칭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평북노회가 올해 111주년을 맞았습니다.

 

한반도의 서북지역에 위치한 평안북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변방이라는 지리적 이유로 북쪽으로부터 줄곧 침략을 잇달아 받아온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평안도 사람들은 조선조 이래 중앙정부의 서북 지역 차별 정책 때문에 고위관직에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푸대접에 대한 반발로 남부 지방보다 훨씬 교육열이 높았기 때문에 아무리 벽촌이라 해도 서당이 없는 동네가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과거의 문과 급제자 수를 보면 평북 정주의 경우 227명으로 전국적으로도 서울 다음 가는 2위로서 유림의 본산지라고 하는 안동보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동안 일관된 서북 지역 차별정책으로 말미암아 급제자들은 중앙 정계 진출 등 고위직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개항 이후 평안도 지역이 새로운 문화와 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차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이래 지배체제로부터 소외당한 평안도민들은 체제이념이었던 유교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고, 조선조에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억압을 당하던 불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더더욱 교세가 약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렇듯 전통종교가 약세를 보이던 지역에는 새로운 종교가 비교적 쉽게 진출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개항 당시 한국의 새로운 종교는 자생적으로 등장한 동학(動學)과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에서 동학이 올라오기 전부터 평안도와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사이에는 이미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 선양) 등지는 한국교회 수립을 위한 최초 기지가 되었습니다. 우장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자를 낳은 곳이요 최초의 한글성경을 번역한 곳이며, 봉천(심양)은 최초의 한글 성경을 출판한 곳이며 한국인 전도자를 선택하여 파송한 곳입니다.

 

존 로스 선교사는 평북사람인 이응찬의 도움으로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가 도입된 한국어교재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1877)’을 만들었습니다.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이 참여하여 1878년 이들이 공역한 ‘누가복음’ 초역이 완성됐고, 1887년 신약성서를 번역하여《예수셩교젼셔》를 간행하는데 이 성경이 최초의 한국어 신약성경입니다.

 

 

낯선 타지에서 한국어 성경을 완성해간 존 로스. 그는 한글 최초로 띄어쓰기를 도입한 것은 물론 “한글이 한문보다 훨씬 정확한 번역본을 만들 수 있는 글자”라고 확신하며 우리 한글을 더욱 우수한 문자로 만들어준 고마운 인물입니다.

 

평북노회는 평북 선천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증해서 1917년 제11회 노회에서 산서노회를 분립, 이어 1918년 제14회 노회에서 의산노회를 1929년 제30회 노회에서 용천노회를 1934년 제46회 노회에서 삼산노회를 1939년 제56회 노회에서 평동노회를 각각 분립함으로써 평북지역에 6개 노회가 성장발전하게 됩니다.

 

평북노회가 제1회부터 중심적으로 실행한 사업은 선교사업입니다. 국내는 물론 만주지역(안동, 봉천, 길림)과 중국 산동성까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편 노회 산하 부인전도연합으로 각 군, 읍, 면에서 전도인을 파송하여 외지선교를 강화하고 제10회노회시에는 내외지역의 선교사 18명을 파송하여 오직 복음전파에 힘썼습니다.

 

이처럼 평북노회는 평북 선천읍을 중심으로 복음이 활발하게 선포되어 약 5천호 이상되는 선천읍 주민 70%이상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곳 선교사들은 선천에 미동병원을 세우고 의료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하는 한 편 선천 신성중학교와 보성여자중학교를 설립 ,남녀인재양성에 크게 이바지하고 또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여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보호, 양육했습니다.

 

평북노회는 1910년 12월 7일 일제가 허위 날조한 105인 사건과 독립만세 사건 등으로 수많은 교역자, 평신도지도자들이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 중 기독교인은 16명, 그 중에 감리교인이 9명, 장로교인이 7명이었는데 장로교인 5명이 평북 분이십니다. 나머지 2분은 평남의 길선주 목사님, 33인 중에 제일 마지막에 돌아가신 경북 출신의 우리 교단 소속의 서울 경신학교 출신인 이갑성 옹이십니다. 평북 출신의 5분, 정주의 이승훈 장로 선천의 양전백 목사(1915년 평북노회장,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철산의 이맹룡 목사. 의주의 유여대 목사. 정주의 김병조 목사 등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제16회 노회시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중에서도 전도의 열심은 가일층 고조되어 3.1독립운동 후 1920년 3월 17일 제 17회 노회에서 만주와 경남 각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더욱 전도에 힘썼습니다. 만주지역에는 1920년 남만노회와 간도노회가 1922년에는 러시아 시베리아에 시베리아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시 평북출신 산동 선교의 현황을 보면 1915년 내양현에 선교사로 파송된 방효현 목사(방지일 목사 부친)를 비롯한 홍승한 목사(1917년), 이대현 목사(1923년), 김순효 여선교사(1931년)가 각각 파송되었고 1937년에는 방효원 목사의 장남 방지일 목사가 대를 이어 약관 26세로 산동성에 파송되었으며 선교에 착수한지 불과 20년 만에 총회는 선교사 4명과 교회 51개 처에 교인 1천 3백24명, 학교 7개로 교세가 확장되어 마침내 1931년 내양노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일본제국은 1940년 제31회 총회 이후 국내 각 교단을 일본의 어용기관으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조직화했습니다. 이때 평북노회는 그들의 교구화로 변질하지 않고 일제의 탄압에 생명을 걸고 대항하여 평북노회를 그대로 유지, 해방을 맞았으며 일제의 교구화라는 어용기관에 가입없이 노회명을 계승함으로서 총회산하 장자노회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는 교회 내분을 꾀하고 교회 자멸을 획책한, 소위 ‘기독교연맹’이라는 집단이 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북5도 연합회는 신앙수호를 위해 이들과 맞서,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1945년 9월에 신의주제일교회 윤하영 목사님, 신의주제일교회는 우리 외할아버지가 장로로 섬기신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신의주제2교회 한경직 목사님이 주축이 되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합니다.

 

기독교사회민주당이 강한 평안도에서 기독교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1945년 11월 18일 용천의 바닷가 마을 용암포제일교회에서 학생들과 주민들의 반공궐기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때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진압당하는 과정에서 용암포제일교회 장로님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용암포제일교회는 우리 아버지가 사찰로 섬기셨던 교회로 담임이셨던 이기혁 목사님은 월남해서는 인천제일교회를 섬기셨고, 그런 연유로 저는 인천제일교회에서 자랐고, 인천제일교회가 운영하는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용암포에서의 만행을 규탄해서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1945년 11월 23 신의주학생의거입니다.

 

1946년 10월 20일 이북연합노회는 동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하는 총선거를 반대하는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여 선포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①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도 참가하지 않는다.

②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구분한다.

③ 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로 권한이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도 이를 사용함을 거절한다.(집회 장소는 물론 선거장소로도 사용하려 함)

④ 현직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이상 조항을 가결할 때 전원 기립하여 엄중히 가결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은 주일인 1946년 11월 3일에 선거를 강행함으로 평북노회 산하 많은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이 선거에 불참, 성수주일을 고수하는 한편 국가적으로 오는 모든 시험에 도전했다. 따라서 이러한 선거불참 등은 마침내 일제 때는 신사참배 문제로 해방 후엔 공산당의 무자비한 정책만행으로 수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 피난 교인들은 부산에서 평북교인들을 중심으로 평북교회를 용두동 중턱에 세우고, 1952년 3월 19일 평북노회가 회순을 거쳐 계승 제73회로 회집되어 지역없는 노회로 출발합니다. 부산평북교회는 지금은 지역노회 소속인 부산 대연동의 산성교회입니다. 저는 1986년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당시는 평북노회 소속이었던 부산 산성교회에서 전임사역을 시작했고 거기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부산에 있던 평북교회의 일부교인들이 대구로 올라와 대구평북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대구평북교회는 직전노회장이신 한명석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대구남성교회입니다. 우리 교단 유일한 장로 총회장이셨던 신흥교회 한영제 장로님과 평광교회 정학선 장로님, 정영록 장로님이 대구에서 정문사라는 서점을 시작했고 그것이 발전해서 지금의 기독교문사가 되기도 했지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립된 후 해방촌교회에 다니던 평북민들과 부산평북교회 교인들이 대거 서울로 이주하면서 1950년에 회현동에서 시작된 서울평북교회에 등록하면서 1954년부터 기틀을 갖추게 됩니다. 그 교회가 지금의 평광교회이고 분립한 신흥교회입니다. 그래서 남성교회, 평광교회, 신흥교회는 한 뿌리 삼형제로 지금도 3교회는 활발하게 교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한 평북노회는 전국을 무대로 무교회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등 전도사역에 적극 힘써왔습니다.

 

1972년 1월 13일에는 평북, 평동 합동노회가 총회합동위원장 강신명 목사의 인도로 우리가 노회를 하고 있는 당시 평동노회 소속이었던 이곳 동안교회 예배당에 모여서 노회 명칭을 모노회인 평북노회로 가결, 역사적인 합동을 이룩하고 발전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첫 노회장이 송치헌 목사님으로 저는 송치헌 목사님이 담임이실 때 신양교회에서 동안교회로 부임해서 부목사로 섬기다가 김동호 목사님이 담임이실 때인 1997년 대전동안교회를 개척하면서 저를 파송하셔서 26년째 섬기고 있습니다. 1972년 당시 합동한 평북노회 첫서기는 지금 세상의빛교회 담임이신 전세광 목사님의 부친이신 장안제일교회 전봉운 목사님, 부서기는 남성교회 이진수 목사님, 부회계는 총회장을 역임하신 신흥교회 한영제 장로님이셨지요. 첫임원을 하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분들은 벌써들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현재 노회산하 8개 시찰, 272개 교회, 7개 기도처로 목사총대 528명, 장로총대 292명, 세례교인 4만 5천여명, 12만여 교우가 이 땅의 복음화와 북한 주민들의 심령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를 소망하며 밤낮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제 무지역 노회로 남북의 믿음의 후손들이 믿음의 선배들의 빛나는 신앙의 유산을 가슴에 소중히 품고 장자노회의 명맥을 이어가면서 21세기 시대에 발맞추어 북한교회 회복을 준비하며 예수정신, 복음의 능력으로 선도하는 노회를 만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행하신 일들을 나타내소서.”

 

-기도

아버지 하나님,지금까지 우리 평북노회를 이끌어 오신 주님의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로 믿음의 선배들이 쌓아놓으신 빛나는 신앙의 유산을 가슴에 소중히 품고 민족복음화와 믿음 안에서 남북한의 통일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특별히 북한교회의 회복을 준비하며 예수정신, 복음의 능력으로 선도하는 노회를 만들어가기를 다짐하오니 주님의 행하신 일들은 나타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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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의회·예천군의회, '행정통합 반대 공동성명서' 발표

데일리연합 (SNSJTV. 아이타임즈M) 김재욱 기자 | 안동시의회(의장 김경도)가 18일 오전 10시 안동시청 시민회관 앞에서 예천군의회와 함께 경북·대구 행정통합 추진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날 시민회관에서 예정된 "대구경북 행정통합 북부권 주민설명회"에 반대하는 5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통합반대 피켓을 들고 행정통합 추진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김경도 안동시의회 의장과 강영구 예천군의회 의장은 공동성명서를 통해 시도민의 동의없는 공동합의문을 즉각 철회되어야 하며, 경북·대구의 공동 생존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동시의회는 지난 10월 25일 행정통합 반대 성명서를 시작으로, 28일 경북 북부권 의장협의외 차원에서 반대 성명과 집회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적극적인 반대 활동을 이어왔다. 또한, 31일 포항시청사에서 열린 반대 집회에 참여하여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반대 의견을 담은 결의문을 전달한 바 있다. 김경도 의장은 "행정통합은 지방소멸 위기 극복의 해법이 될 수 없다"며, "경북도의회와 대한민국 국회는 시도민의 뜻을 반영해 경북의 정체성과 시도민의 자존심을 지킬수 있도록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