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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전중호 작가 노트

 

어느 날 지인에게서 사진 몇 장을 소개받았다. 사진 속 풍경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체코, 남모라비아로 떠났다. 그곳은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근대 선교역사에 100년 동안 매일 24시간씩 무릎을 꿇었던 모라비안 교도의 기도가 평화로운 대지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시간 동안 카메라를 둘러메고 여러 곳을 다녔지만 체코는 특별했다. 선과 색과 패턴이 주는 조화를 뛰어 넘어 300mm 화각에 알맞은 특이한 풍광의 이미지는 잊을 수 없다.

 

 

봄에는 땅이 넉넉해서인지 곳곳에 갈색의 휴경지가 있다. 비에 촉촉해진 까만 흙과 녹색의 밀밭, 군데군데 노란 유채꽃이 색감을 자랑 한다. 가을엔 평범한 옥수수밭도 추수가 끝나면 트랙터가 지난 자리로 멋진 궤적을 만들어 낸다. 더구나 수확을 기다리며 온몸을 까맣게 태우는 해바라기 밭도 패턴 속에 있다.

 

그래서 5차례나 모라비아에 갔다. 풍광은 매번 달랐지만 언덕과 언덕이 만나는 선과 색과 면의 평화로움은 같았다. 그 중에서도 군더더기를 뺀 단순화된 패턴을 찾아 구릉을 몇 번이나 넘었던가!. 그리고 체코의 들판은 나에게 속삭여 주었다 . 이렇게 찍으라고 14년의 내 사진 작업 방향을 정립해준 체코의 들녘이 사랑스럽다. 그 땅은 나의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었다.

 


 

에필로그

 

사진 작업하면서, 결과물에 마음이 뿌듯해지기는 참 어려운 일인데 내 마음은 평화로 가득 차있다. 자꾸만 전시회가 기다려진다. 그 먼 체코에서 포인트 찾아 운전하며 끼니마다 쌀밥에 김치찌개로 힘을 실어 준 내 아내에게 이 사진전을 바친다.

 


 

‘체코 풍경의 구성’

 

내가 다소 길게 컬러 사진의 지난날을 회상해 본 것은 전중호의 컬러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지난 날 컬러 사진의 대가의 향기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이탈리아 컬러 사진의 마술사 프랑코 폰타나(Franco Fontana)가 연상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그건 확실한 폰타나에 대한 기시감, 그것이었다.

최 건수(사진 평론가)

 

글을 쓰면서 가장 조심스러운 것은 진정성이 없이 단지 아름답게 쓰려는 마음이다. 미문의 유혹에 빠진 이런 글은 자칫 형용사와 부사의 그늘 속에 명사가 묻혀 진다. 무참하다. 동어반복을 후렴구처럼 쓸 때도 마찬 가지다. 그 상투성을 벗어난 지점에 진실이 있을 텐데. 자신이 써야 할 것을 장악하지 못할 때, 글은 불필요한 호들갑을 떨기 마련이다.

 


 

글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듯이 사진도 예술 행세를 하려면, 다시 미(美)에 대한 사유가 절실히 필요해진다. 예술에서 미는 단순 아름다움이나 재현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화에서 트롱프레이유는 사실주의의 가장 타락한 형태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기에 단순한 미나 재현이 사진의 전면에 나서서 설치면, 아마도 감동에 취약한 다수에게만 호소하는 헤픈 예술로 끝나리라. 적어도 사진을 예술의 한 갈래로 받아드린다면, 고단하드라도 가벼운 감동을 경계하고 소수에게 말을 거는, 조금은 묵직한 예술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경계와 아름다움을 향한 갈증 사이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긴장관계와 같은 틀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아마 그 밀고 당기는 요소 중 하나가 색(色)이리라. 사실 1839년 발명 시, 세상을 재현할 수 있다는 놀라움 속에서도 색이 없는 세상에 대한 아쉬움은 1907년, 영화 발명가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Auguste & Louis Lumiere) 형제의 오토크롬(autochrome)이 나올 때까지 미루어 두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녹녹한 것은 못되었다.

 


 

전문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가들은 다시 1935년 조지이스트먼 코닥이 개발한 코닥크롬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비로소 세상이 온전한 컬러 세상으로 사진 위에 재현 된 것이다. 그러나 사진작가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 색을 편입 시키지 것에 인색했다. 왜 색이어야 하는가?, 흑백 보다 컬러 세계가 작품 속에 어떤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진이 좀 더 세상에 근접한 사실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컬러에 대한 진지한 검토 후에 컬러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운 사진가라면 에른스트 하스(Erenst Hass), 엘리옷 포터(Eliot Porter), 프랑코 폰타나(Franco Fontana)이리라. 모두 60 년대를 그들의 무대로 삼았던 사진가들이니, 코닥칼라 이후 삼십 년 만에 컬러가 사진 예술 속에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된 것은 그들의 공이다. 아마 이들이 없었다면 조엘 메이어러위츠(Joel Meyerowitz)나 윌리엄 이글스톤(William Egglestone), 스테판 쇼(Stephen Shore) 등에 의해서 견인 된 70년대의 컬러 세상이 만개하지는 않았으리라.

 

70년대 이후 다시는 컬러가 미학적 연구 대상으로 떠오른 적은 없다. 내가 다소 길게 컬러 사진의 지난날을 회상해 본 것은 전중호의 컬러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지난 날 컬러 사진의 대가의 향기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이탈리아 컬러 사진의 마술사 프랑코 폰타나(Franco Fontana)가 연상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그건 확실한 폰타나에 대한 기시감, 그것이었다.

 


                                체코 대사와 전시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인사하는 전 작가

 

전중호의 촬영지가 체코였던가? 시골의 구릉은 바다의 너울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는 환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들판은 마치 물감을 풀어 놓은 색면(color field), 그것이었다. 그가 찍은 들판은 비스듬한 사선을 이용하여 절제 된 화면을 보여 주는데, 풍경의 단순한 조형미는 전적으로 300mm 망원렌즈를 통해서 얻어진다. 어떤 렌즈도 세상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을 반영하도록 제작 되겠지만, 선택 된 렌즈는 찍는 자의 미의식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것은 일종의 프레임 의식이겠는데, 세상과 프레임 안을 무의미와 의미로 구분하고, 프레임 안의 세계만을 유의미하다고 보는 것이 작가 의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작가는 한 부분만 드러내지만 전체와 연결시킬 수 있는 여지를 프레임을 경계로 열어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연결은 아마도 보는 자의 상상력이지 않을까 싶다. 전중호의 화면의 특색은 긴 렌즈로 풍경을 공기를 뺀 듯 압축함으로 단순화 된 조형적 모험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구상적 추상으로 향하는 움직임 같다. 서로 무관하게 색으로만 분리 된 구릉의 공간들이 찍는 자의 직관 혹은 느낌 하에서 하나의 이웃이 되어 동거를 시작한다.

 


 

이때, 구릉과 구릉이 실용적인 가치 평가는 무의미하다. 단지 면대 면으로 만나지만 다른 색을 기반으로 서로 삼투하여 조형적 질서 속에서 하나로 통합 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긴 망원렌즈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기하학적 패턴을 축으로 삼아 그것을 자유롭게 변형함으로 그가 본 풍경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황홀한 풍경을 만나면, 경력이 일천한 사진가들은 허둥대고 흥분하기 마련이다. 그것에 매달려 재현 하는 것에 카메라는 급급해 진다. 풍경이 어려운 것은 이 지점이다. 자칫, 풍경에 경도되어, 풍경을 찬양하는, 형용사와 부사를 남발해 버리고 마는 문장처럼, 알맹이 없는 쓸쓸한 풍경으로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집중하여 대상을 살피는 데 있다. 그 요소들을 살펴보고, 그 구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 없다면, 풍경은 내게 새롭게 감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풍경은 나의 예술혼에 기대어 견인해야 하는 것이지, 그것에 끌려가면 안 된다.

 

풍경의 짱짱한 아름다움은 바다 사나이들의 죽음을 부르는 요정, 사이렌들의 노래와 같다. 풍경에 현혹되지 말라. 물론 찍어야 할 대상에 대한 찬양이고 감동이 없다면 사진가의 셔터는 얼마나 건조하겠는가? 그러나 풍경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와 대상과의 내통 속에 쓸 만한 사진이 찍혀진다는 것은 다른 사진 찍기와 마찬 가지로 풍경 사진이어도 동일하다.

 

전중호의 풍경은 풍요로운 색과 선, 면들이 음악의 느린 라르고처럼 교차하면서 빚어낸 구성적 패턴의 베리에이션이다. 단지 이런 요소들이 색과 선이라는 조형적 요소에 갇혀 있지 않고, 찍은 자가 염원하는 세계로 항해하는 과정에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의 꿈꾸는 세계로 가는 예술적 궤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물어 보았고 전중호는 ‘평화’라고 답을 내놓았다. 그가 믿는 창조주가 내보이는 아름다움에 그의 몸을 의탁했고, 그것을 보았고, 그것들에 말을 걸고, 그것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그의 찬양에 대한 답이 ‘평화’가 아닌가 싶다.

 


 

신은 천지를 창조한 후 스스로 짧은 평가를 내렸다. 성경은 바짝 졸인 문장으로 짧게 적어 두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그것이다. 그러나 전중호가 들판의 ‘만나’를 기다리듯, 보시기에 좋았던 저 들판을 거울처럼 찍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한 사진가의 세계이기보다 창조주의 세계에 대한 거울 기능에 머물렀을 것이다.

 

다행이다. 전중호의 첫 개인전이 이런 아마추어리즘에 침윤 된 상투적 틀에서 빗겨 있어 호감이 갔다.

 

신의 창조물로서 자연과 사진가의 감수성이 드러난 사진예술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전중호의 화면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적절하게 아우르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찍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형(形)이나 색(色)으로 환원 시키는 것이기에, 하나의 느낌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이점은 앞서 언급한 프랑코 폰타나와 매우 흡사한 것 같다. 프랑코 폰타나의 경우, 자연의 형에서 작업의 소재를 얻었지만 결코 대상에 억매이지 않았다.

 

그 탈출구를 깊이를 없애버린 화면이 보여주는데, 2 차원의 화면의 평면성을 최대한 존중하기 위하여 풍경의 깊이를 색의 변조를 통하여 지워버리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색체 사진이라기보다는 채색 사진으로 변모 시키는 것이다. 전중호의 사진도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 자연이 베푸는 색을 상당부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CG 프로그램에 의해서 색을 통제하고 장악하려는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자신만의 시각언어를 갖겠다는 의지로 보이는 까닭이다. 단지 폰타나를 빗겨가는 것은, 통제 된 색 속에서도 자연의 디테일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부분이다.

 

여행 자유화 이후 수많은 사진가들이 해외에 다녀왔다. 그리고 기이한 모습을 카메라에 밀어 넣고, 그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그러나 대부분 실망스러웠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미 낯익은 것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상에 종속적이고 보니, 정작 자신의 사진을 못하고 만 것이다.

 

전중호의 장점은 그가 찍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에 있다. 주마간산 식 촬영이 아니라, 되풀이하여 그 먼 곳을 찾아가서, 하나의 작업으로 마무리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을 전중호는 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작업 태도가 아니냐. 그러니 두 번 째 전시도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

                                                                       이성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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