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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리더쉽, 머슴 신학, 머슴목회자 이자익 목사’

‘이자익 목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는 류철랑 부천 동광 위임 목사가 섬기도 있다.

 

예배 시, “나는 조덕삼의 마부였습니다” 하는 그의 설교에서 그의 겸손을..

 

이자익 목사는 누구인가? 이 목사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서, 전북

김제의 대지주 조덕삼 (조세형 전 국회의원의 조부 )씨와의 일화로 유명하다.

 

이 목사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를 불쌍히 여기고 집에, 머슴 겸 마부로 받아들인 이가 김제의 대지주 조덕삼이었다. 대지주 조덕삼씨는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를 공부하는 그를 눈 여겨 보았고, 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했다.  

두 사람 사이가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 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만나 함께 예수를 영접하면서였다. 1902년에는 ‘ㄱ ’자 교회 금산교회를 짓고, 그해 가을 동시에 세례와 집사 직분을 받았다.

1907년 장로 1명을 투표로 선출할 때 교회 설립자인 조덕삼이 안 되고, 마부 출신인 이자익 목사가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이때 조덕삼씨는 이를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고, 평신도로서 집사의 직분으로 교회를 잘 섬겼다. 그 당시만 하여도 신분 격차가 심하였던 상황을 본다면, 조덕삼 집사의 태도는 존경할 만한 신앙이었다.

특히, 조덕삼씨는 이자익 목사의 믿음을 귀히 여겨, 평양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였고, 졸업할 때까지 신학교 등록금 전액을 지원하였다. 굿 뉴스는, 그로부터 5년 후, 그를 자신이 장로가 되어, 섬기던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한 애피소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대지주가 자기 집안의 머슴이던 목사를 섬기는 에피소드!!  

이를 두고, ‘섬김의 리더십’의 저자, 김형대 목사는 강의에서, “이자익 목사의 진실하고 겸손한 목회자”라며 “우리 한국교회가 초심으로 돌아가 주님의 섬김의 길을 따르는 종들이 곳곳에서 들풀처럼 일어나길 기도한다 ”고 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누구인가? 이 목사는, 예수교장로회 교단 총회장을 하면서도

‘나는 마부였습니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겸손한 목회자로 유명하다.

 

이자익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24년 9월 13일, 함흥 신창리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총회장 선거를 하여, 총대 196명 중 과반 표를 얻어 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이자익 목사는 부총회장을 하지 않고, 바로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 당시 이자익 목사는 대형 교회 목회자도 아니고, 도회지교회도

아닌, 농촌교회 담임으로 섬기면서 섬김의 리더쉽으로 총회를 맡아 일하게 된다.

총회에 참석한 회원 가운데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남장로교 전주선교부의 테이트 (L. B. Tate, 한국명 최의덕 )선교사였다. 그가 전주에서 금산으로 다니면서 금산 지주요 부자인 조덕삼과 그 집 마부로 살던 이자익에게 전도해서 그 두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테이트 선교사가 금산교회 설립교인인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에게 한날 한 시에 세례를 베풀었고, 또 한날 한시에 집사와 영수로 임명하고, 이자익을, 금사교회 초대 장로로 임직케 하였다.

또한, 테이트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었으니 이자익 총회장과 테이트 선교사의 만남은 전도 열매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기뻤던 것이다.

 

테이트 선교사는 “이자익 목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된 일은 제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라며, 감격하며, 미국 선교부에 이 소식을 알렸다.

 

총회를 열면서 이 목사가 총회가 열리고 있는 함흥 신창리교회 설교를 하면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저는 전라도 김제군 금산리에 있는 조덕삼 장로의 가정에서 마부 생활을 하다 최의덕 선교사의 전도로 조덕삼 장로와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장 총회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다.” 라 하였다 한다. 이 모습을 보더라도 그의 겸손은 사람들에게 감동이었다.

왜 그의 리더쉽을 사람들은 말하는가? 왜 그를 오늘날 ‘큰 바위 얼굴’이라 하는가?


이자익 목사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어려웠던 시절을, 그리고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 대한 고마운, 감사한 마음을 간직했다. 그는 고향 남해를 떠나 일가친척도 없는 전라도 김제에 와서 좋은 주인을 만났고, 조씨댁의 마부로 일하면서 주인과 함께 테이트 선교사로부터, 예수를 영접하여 장로가 되고, 목가가 되어, 교단 총회장까지 되었으니, 신의 은총이엇다.


함께 예수 믿고, 장로로 섬기고,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학비와 가족생활비를 지원해준 훌륭한 주인, 조덕삼 장로의 도움을 고마워했다. 이자익 목사는 1953년 제 38회 총회 헌법수정위원장을 맡았다. 그 일로 박형룡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그 당시 총회신학교에서 교회 헌법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1924년 제 13회 총회장, 이후 1947년 제 33회, 1948년 제 34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니 3대 총회장을 한 전무후무한 총회장이었다. 이자익 목사가 3번에 걸쳐 총회장을 지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겸손함이었다 한다.

 

총회 개회 예배시 “나는 조덕삼의 마부였습니다 .” 하는 그의 설교에서 그의 겸손을 본다. 그는 어려웠던 지난 세월. 남의 도움 받던 시절에도 범사에 감사하면서, 처음의 신앙을 잃지 않았었다. 예수님의 그 ‘온유와 겸손 ’을 목회자들과 기독교 신자들의 닮아가야 할 아름다운 덕목이다.

 

현재, 이자익 목사를 기리는 기념사회가 대전신학대학교에 있는데, 이자익 목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는 류철랑 목사가 섬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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