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연합 (아이타임즈M 월간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이성용 목사는 감히 말한다. 세상돌아가는 트랜드를 읽어라. 온누리에 복음을 전할 마인드를 가져라. 다양한 영성을 이해하며 서로 다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하고, 융합하여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이루자며, 세계적인 영성 필독서를 소개했다.
성경에 나오는 박애주의 영성의 예를 들어 본다.
A. 모르드개
에스더에 그려진 모르드개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깊이 돌보고 아낌없이 에너지를 쏟아 도와 주는 이의 초상이다. 모르드개의 첫 번째 그림은 에스더 2장 7절에 나온다. 우리는 부모의 강제 이주로 인해 고아된 에스더를 거두는 모르드개를 볼 수 있다.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를 위한 모르드개의 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왕궁에 들어간 후에도 그는 늘 에스더가 잘 지내는지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았다.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 것을 알고자 하더라.”
모르드개의 두 번째 그림은 2장 후반부에 나온다. 이번에 모르드개가 챙긴 사람은 왕이었다. 그는 왕의 두 신하가 왕을 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소리를 들었다. 모르드개는 들은 내용을 고하여 왕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구했다. 불과 두 장에서 벌써 모르드개는 고아를 거두었고 왕을 보호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사람에 영합하는 자가 아니었다. 3장에 보면 모르드개는 하만 앞에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하만의 분노를 산다. 모르드개는 남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때는 남을 섬겼다. 그러나 그 둘이 서로 충돌할 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모르드개는 고아를 거두었고 왕을 챙겼을뿐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 전체를 살렸다. 모르드개는 긍휼이 많은 자였으나 나약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단호한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는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이들에게까지 강하게 나갈 수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이 있다. 일찍이 모르드개가 고아 에스더를 돌보지 않았다면 후에 달리 왕 앞에 나아갈 길이 없었을 것이므로 온 이스라엘은 망했을 것이다. 이전의 긍휼행위가 그보다 휠씬 규모가 큰 이후의 긍휼 행위의 기회로 이어졌다. 기회가 나면 모르드개는 남을 도왔다. 처음에는 고아, 다음은 왕, 다음은 온 민족, 다음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에스더서 마지막 절에 나오는 총평은 그에게 꼭 어울린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르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존대하여 그 허다한 형제에게 굄을 받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B. 예수님
유사 이래 진정 온전한 인간은 오직 예수님뿐이었다. 그래서 그 분께는 이 책에 나오는 영적 기질이 모두 보인다. 반면 우리는 분열되고 깨어진 존재인지라 그리스도의 삶이 보여준 그런 깊이와 넓이가 없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긍휼의 완전한 표상이었다. 그분의 삶은 특히 그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예수님은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고, 친히 무리를 보시며 몹시 측은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를 다른 사람들의 필요보다 아래에 두셨다.
긍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이웃을 돌봄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도전은 무수히 많다. 선한 사마리인의 이야기는 신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비유 중 하나일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가르침을 통해 긍휼을 강조하셨다. 바울도 요한과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돌볼 것을 권한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히브리서 기자는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동등시한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니라.” 얼마 후 같은 저자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할 수 있음을 신자들에게 일깨운다. 야고보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서로 대접할 것과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해 서로 섬길 것을 권한다.
이 가르침이 폭, 그리고 그것이 신약의 수많은 기자들을 통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박애주의 영성-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 박애주의 영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남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특히 내게 큰 도전을 준 구절이 있다. 이 진리에 붙들리던 그 오후를 나는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소돔성은 성경에서 최고의 악한 도시로 일컬어지곤 한다. 그러나 소돔의 가장 중요한 죄는 정말 무엇이었을까? 에스겔서 말씀을 들어보라.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무관심)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 도와 주지 아니하며”
내 삶에도 틀림없이 교만이 많이 있다. 세상적 기준으로 나는 분명 ‘식물이 풍족한’ 자다. ‘무관심’의 태도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사실일진대 나를 소돔-성경에 그려진 가장 저질 형태의 죄악-의 죄에서 지켜주는 유일한 것은 내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고’ 있는지 여부다. 우리는 곧잘 거룩함을 죄짓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은 부작위의 죄(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작위의 죄(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것)와 똑같이 중하게 여긴다.
박애주의 영성의 여러 형태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워야 하다.
1)죄수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 2)개인적 위기를 만난 친구를 도와 주는 것
3)돈을 빌려 주는 것 4)약물 중독과 싸우는 사람을 거드는 것 5)구조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것 6)문맹에게 글을 깨쳐 주는 것 7)매 맞는 여성 보호 시설에 시간을 헌신하는 것 8) 미혼모 상담소에서 상담하는 것 9)노숙자를 위해 주방에서 일하는 것 10) 남의 차를 고쳐 주는 것 11)집을 수리해 주는 것 12)시각 장애자를 위해 녹음해 주는 것 13)질병의 치료약을 연구하는 것 14)컴퓨터 시스템 재구성을 도와 주는 것 15)피곤한 부모들의 자녀를 봐 주는 것
스티브 소그렌(Steve Sjogren)은 「친절의 모략」(Conspiracy of Kindness)이라는 책에서 봉사와 전도의 배합을 제안했다. 당신의 차가 막히는 출퇴근 시간에 음료수를 나뉘주고, 대학 캠퍼스에서 핫초코렛과 커피와 쿠키를 돌리고, 인근 공원에 나온 가족들이나 조깅하는 사람이나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 무료로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 잔을 돌리고, 노인 단지에서 낙엽을 긁어 모으거나 잔디를 깎고, 가난한 이들한테 무료로 불쏘시개와 장작을 나뉘주고, 집 앞길과 인도의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랄 이웃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성령께서 감화하고 인도하실 때, 남을 도우려는 자들에게 펼져진 기회의 수는 제한이 없다. 전도의 한 방편으로 하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봉사로 하든 그것은 행동화된 복음의 강력한 그림이다.
박애주의자들은 선지자다
남을 돌보는 것은 선지자적 행위이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 동물인지라 남에게 관심을 품는다는 것은 비본성적 반응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손길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박애주의자들이야말로 아주 가시적 방법으로, 즉 긍휼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증인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본성적 반응은 이기적이다. 성경에 그런 모습이 많이 나온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 양편에 앉고 싶어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거기에 분개했다. 야곱은 음모를 꾸며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챘고, 롯은 제일 좋은 땅을 선치했다. 여리고로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다친 사람을 못 본 척 했다.
어느 전국적 구제 기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아 해결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광고를 보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희생하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기분이 좋아집니다’라는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광고에는 ‘당신의 기분이 좋아집니다’라는 말이 시종 수차례 반복된다. 한 저자가 지적했듯이 그리스도께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네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긍휼을 베푸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인 문화와 때로는 이기적인 교회에 예언자로서 말하는 셈이다. 참된 긍휼의 중심은 희생이건만 이기심은 진정한 희생을 방해한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참된 사랑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아프다. 그래야 참되고 순결한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순종의 기쁨을 맛보려면 희생의 고통을 지나야 한다. 이렇듯 ‘선지자적’ 긍휼은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 즉 하나님이 나를 한없이 사랑하심을 알기에 남들을 돌보는 것이라야 한다.
프린스턴대학교 사회학 교수 우트나우(Wuthnow)는 대학 연구들을 인용해, 긍휼과 선행을 가장 잘 유발하는 종교적 신념은 ‘인간이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인격적 하나님, 그리고 인간의 인격적 가치를 인정하는 신념 체계’이며, 그런 요소들을 실험적 연구를 통해 최대한 측정해본 결과,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인식은 실제로 남을 돌보려는 자발적 의향과 직결된 듯 보인다고 말했다.
박애주의 영성의 유혹
A. 판단/박애주의 영성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판단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부름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본분을 다하는 길은 각기 다를 수 있다.
B. 이기적 동기로 남을 섬김/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봉사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영성으로서의 긍휼은 남에게 다가감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한다. 마음에 사랑이 넘쳐 주변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반면 질환으로서의 긍휼은 사실상 탈취 행위다. 그것은 기만행위다. 상대를 사랑하되, 보상으로 자신을 사랑하거나 의존하게 만들려고 그리하기 때문이다.
한 치료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생활이 뜻대로 안되니까 하층민들을 돌본답시고 자원봉사 기관에 들어오는 여자들을 보면 나는 정말 싫다. 그러잖아도 문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내 필요까지 채워 주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다.”
C. 편협한 정의/사실 긍휼 사역을 하다가 행동주의자로 전향하는 사례가 왕왕 있다. 도심지 빈민을 돌보던 사람은 결국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정부 구조의 개혁 작업에 뛰어들 수 있다. 박애주의자들은 행동주의자의 동기를 판단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둘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한 쪽에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힘쓰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문제가 풀릴 때까지 위안을 베풀 수 있다. 긍휼의 정의가 편협해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 돌봄과 문제 경감을 위한 단기적 돌봄의 구분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 나라 사역에는 양쪽 다 필요하다.
D. 측근 사람들의 무시함/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열정도 좋지만 하나님이 가정에 우선순위를 두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박애주의 영성의 소명
긍휼은 모든 신자의 본분이지만 이런 형태의 봉사에 특별한 은사와 소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이런 자비의 행위가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아주 실제적인 길이다. 박애주의자들은 조용히 앉아 기도할 때보다는 성인 환자의 기저귀를 갈아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더 선명히 들릴 수 있다. 이것은 고결하고 거룩한 소명이다.
▶사진 설명 2 청주온누리교회 이성용 목사. 케리토마스의 영성 이해는 다양한 리더쉽으로 이끌어가는 사회속에서 이 시대를 열어가는 최고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 ㈜한국미디어그룹 회장 말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