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연합 (아이타임즈M 월간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이성용 목사는 감히 말한다. 세상돌아가는 트랜드를 읽어라. 온누리에 복음을 전할 마인드를 가져라. 다양한 영성을 이해하며 서로 다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하고, 융합하여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이루자며, 세계적인 영성 필독서를 소개했다.
기독교 역사에 스콜라 신학이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4세기부터 내려온 어거스틴의 기초 작업을 바탕으로 중세 전성기를 꽃피우고 교회를 암흑의 시대에서 끌어낸 것은 다분히 스콜라 신학이었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강력한 사조가 곧 그 뒤를 따른다. 중세 전성기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많은 개혁 신학자들은 아퀴나스의 사상이 이후의 종교개혁 사상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믿는다) 역사의 이런 측면을 바로 파악하여, 디모데전서 2장 1절에 따라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기도에는 다른 모든 요소들과 아울러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생각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성주의 영성에 대한 성경의 시각
모세가 축복한 레위 지파는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지파였다. 레위인들은 연구하고 가르치는-즉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직무를 다하기 위해 다른 직무들이 면제되었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성을 종교적 지혜의 말에 국한하지 않았다는 것은 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하나님은 의당 만물의 창조주이시기에 그는 자연 세계도 탐구했다. “(솔로몬이)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생물학 교수는 조직신학 교수와 하등 다를 바 없이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에 자연 세계를 탐색하고 궁구하고 설명하는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밝혀주어 우리로 그분을 더 잘 알게 해줄 수 있다.
잠언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 훈련된 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말씀도 많이 있다. 잠언은 우리에게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라”고 말한다. 또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는 말씀도 있다. 바른 생각-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일치시키는 것-은 바른 삶을 가능케 한다.
예수님도 친히 지적 성향을 보여 주셨다. 열두 살 때 그분은 성전에서 율법을 논하고 있었다. 가르침은 그분의 사역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지성교육
전 세계 각국에서 기독교 교회는 그리스도인 지성 훈련을 목표로 한 교육을 통해 진보하고 있다.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에 이것은 감격스런 현실이요 깊은 힘의 원천이다. 나는 누구나 이런 경험을 통해 뭔가 얻을 수 있다고 믿지만 특히 지성주의자들은 정식 신학 교육에서 큰 유익을 얻는 좋은 학교는 졸업 후에도 계속 혼자서 공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준다. 처음 견고한 기초를 쌓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 시간과 비용 때문에 실제로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면 언제나 라디오나 비디오를 통한 개방 강좌를 고려할 수 있다. 유명 교수들의 녹화된 강의를 활용해 자기 교회에서 소규모 그룹 스타디로 시작할 수 있다. 그룹 역동 속에서 공부하는 것은 언제나 유익하다.
훈련 분야
지성주의자들은 신학 훈련의 기초 분야를 배워 자신의 신앙을 넓히려 애써야 한다. 기초 분야에는 교회사, 성경 연구, 조직신학, 윤리학, 변증학이 포함된다. 정식 신학교 교육에는 그밖에도 몇몇 분야가 더 있겠지만 학식을 갖춘 그리스도인 지성을 기르는 데는 그 다섯 가지가 좋은 출발점이 된다.
A. 교회사
교회사에는 위대한 신앙, 헌신, 경건에 대한 감동적 실화가 무수히 많다. 뿐만 아니라 교회사는 머리와 가슴을 이어준다. 교회사에 식견이 넓은 그리스도인은 어느 교회에나 귀한 지도자 일원이 될 것이다.
교회사는 신학 지성을 쌓는 필수 기초다. 교회사 없이 신학을 이해하려는 것은 기사 내용을 무시한 체 헤드라인만 읽어 세상사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
B. 성경 연구
나는 신앙 생활의 어려움의 90%는 우리가 성경을 충분히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믿는다. 성경연구는 그렇게 중요하다. 넓게 말해 성경 연구는 세 가지 요소로 구분될 수 있다. 성경을 통독하는 것, 성경의 일부를 꼼꼼히 공부하는 것,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는 것이다. 1년 1독이나 3년 1독 등 모종의 프로그램을 따라 성경을 꾸준히 통독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습성이다. 나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꼭 들어야 할 내용을 꼭 들어야 할 때 만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으면 우리 마음 속에 진리를 들려 주실 수 있는 놀라운 도구를 하나님께 드리는 셈이다. 날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영향에 감격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나는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지성주의 영성이 아닐지라도 매일의 성경 읽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C. 조직신학
조직신학은 구원, 세례, 교회질서 등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는 분야이다. 우선 시작할 두 권의 탁월한 책으로 J.I. 패커의 「간추린 신학」(Concise Theology)과 R.C.스프롤 「기독교의 핵심 진리 120가지」(Essential Truths of the Christian Faith, 생명의 말씀사)가 있다. 둘 다 입문서 내지 재교육 수준의 기독교 교리 선집이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성바오로 출판사)과 깔뱅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등 많은 고전이 있다. 당신의 속한 교단의 신앙을 설명해줄 1권 내지 여러 권의 좋은 작품을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직신학에는 하나님, 인간, 예수님, 성령, 교회, 종말론, 계시 등의 7가지 기본 주제가 있다. 조직신학 총서들 외에 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들도 읽을 수 있다. 예컨대 교회에 관해서는 척 콜슨(Chuck Colson)의 「이것이 교회다」(The Body, 홍성사),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는 J.I.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IVP)이나 R.C.스프롤의 「하나님의 거룩하심」(The Holiness of God, 생명의 말씀사)이 있다.
D. 윤리학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지만 아울러 행동의 종교이기도 하다. 기독교 윤리학 공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범사에 기도하며 결정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프랜시스 쉐퍼를 통해 유명해진 구약성경의 질문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하려 하는 것이 윤리학이다.
윤리학 공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필요성과 실체를 일깨워 준다. 구원이란 지옥을 피하는 문제 이상이다. 구원이란 여기 이 땅에서 변화되어 새 사람을 입는 문제이다. 윤리학 입문서로서 존 제퍼슨 데이비스(John Jefferson Davies)의「복음주의 윤리학」(Evangelical Ethics)를 생각할 수 있다. 존 머레이(John Murray)의 「행동 원리」(Principle of Conduct)나 C.S. 루이스의 고전 「인간의 폐기」(The Abolition of Man)도 읽을 수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문제에 더욱 적극 가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유익을 위해서도 그렇다. 기술 발달로 윤리논의에 전혀 새로운 장들이 열리고 있다.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수명이 끝나는 시점을 어떻게 아는가? 핵전쟁은 ‘정의의 전쟁’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빈곤층이 이토록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책임감 있게 살아갈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들이 날마다 부딪치는 문제들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지침을 제시하고 각 문제에 대해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줄 탁월한 지성주의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 변증학
변증학은 오늘날 불신의 한복판에서 신앙을 설명하고 변호하는 방법을 다룬다. 아울러 이단-특히 기독교 혹은 비기독교 집단에서 나오는-앞에서 기독교의 참된 교리를 변호하는 일도 변증학에 들어간다. 변증학의 이 두 지류를 나는 각각 ‘외부’ 변증학, ‘내부’ 변증학이라 부른다. 전자는 기독교가 거짓이라고 믿는 자들을 상대로 한 신앙의 변호인 반면 후자는 기독교를 믿는다 하되 기독교의 참된 교리에 어긋나는 교훈을 고수하는 이들을 상대로 한 변호이다.
변증학 분야의 두 권의 현대 고전은 폴 리틀(Paul Little)의 「이래서 믿는다」(Know Why Youn Believe)와 조쉬 맥도웰(Josh McDowell)의 「판결을 요하는 증거」(Evidence That Demands a Verdict)이다. 전도자이자 변증자인 래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는 복음주의 진영의 선도적 변증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의 책 「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가?」(Can Man Live Without God?)는 현실 타당성과 지적 탁월성을 여러 난제들에 답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와 로널드 타셀리(Roland Tacelli)의 「기독교 변증학 핸드복」(Handbook of Christiam Apologetics)은 ‘변증학의 요점을 사실상 책 한 권에 담은 독학 강좌’로 평가받고 있다. 「믿음의 이유」(Why Should Anyone Believe Anything at All?)에서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는 대학에서 검증된 자료를 활용해, 대학생들로 하여금 믿음의 본질과 기타 의문들을 설명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F. 신조
리젠트대학교수 클로스 복뮤얼 박사는 죽기 전, 우리는 20분마다 교리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신조는 그것을 도와주며 따라서 영적 성장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일단 신조나 교의나 신경(信經)을 버리면 우리의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능력을 상실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실은 사탄을 섬기는 극악무도한 관행에 빠져들 수 있다. 이차대전 당시의 유명한 영국 작가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의 말은 신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옹호할 각오가 옹호할 각오가 없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도덕의 중요성을 논하는 것은 하등 부질없는 것이다. 교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하나의 감정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 을 주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기독교란 순진하게 위안이나 주는 애매한 이상주의적 동경으로 제시하는 것은 절망적인 일이다. 반대로 기독교는 타협 없는 철저한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견고하고 강하고 엄격하고 복합적인 교리이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누구나 웬만큼 알고 있으므로 조금씩 실천만 권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극히 위험한 것이다. 냉엄한 사실은 ··· 하나님이나 인간이나 사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백 명 중 하나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믿는 내용은 그분을 섬기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한 인간에 대해 믿는 내용이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똑같다. 현대의 지성인들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둘 다 꼭 필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이것은 중대한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신조란 이런 신앙고백의 말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신조는 총체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시적 교회 전체용으로 작성, 통용되는 ‘초교파’ 신조도 있고 예컨대 장로교나 천주교 등 특정 교회 분파용으로 작성된 ‘내부’ 신조도 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오 신조, 아우구스부르크 고백, 웨스트민스트 고백 등은 함께 좋은 출발점이 된다.
지성주의 영성의 유혹
A. 변론을 좋아함
디모데는 변론을 좋아하는 지성주의자가 아니었나 싶다.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두 편지에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을 삼가라는 강력한 권고가 몇 차례 나온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그런 사람은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 자신에게 준 권고 못지 않게 디모데를 따르는 자들에게 존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모데후서에 가면 경고가 좀더 개인적 색채를 띤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어쩌면 바울은 남을 ‘교정해 주는’ 것을 약간 지나치게 즐기는 디모데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가르치기를 중단하고 논쟁으로 넘어가는 선이 있다. 미세한 선이지만 우리는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랑 없는 토론 - 즉 상대의 유익을 진정 걱정하기보다는 이기려는 목적의 논쟁 -은 경건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교만한 지식 자랑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다
B. 행동없는 지식
옳은 길을 아는 것은 옳은 삶을 사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옳은 길을 알수록 언행일치의 책임이 더 커진다.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잠언서에 따르면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하여 깨달은 의의 길을 열심히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바른 생각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필수지만 바른 행동도 똑같이 필수다.
C. 교만
교만은 뛰어난 지성인들의 공통된 약점이다.
그것은 무턱대고 아무나 교정해 주려는 공통된 욕구를 통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의 지적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자존감이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내보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남달리 뛰어난 지성의 은사를 주셨거든, 교회를 섬기라고 맡겨준 것임을 잊지 말라.
고귀한 소명
지성주의자들은 성인 소그룹 모임, 신문 논설, 친구들이나 가족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전 세계 도처의 많은 단체에 진리를 증거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내 경우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뭔가를 배울 때마다
그것을 통해 그분과 더 가까워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확신컨대 이것은 지성을 넓힘으로 간절히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간증이 될 수 있다.
3부 하나님이 설계하신 나의 영성을 찾아
영혼의 정원가꾸기
한 위대한 그리스도인 전도자는 임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내게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실어 나를 말(馬)을 주셨다. 나는 말을 죽도록 때렸고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메시지를 실어 나를 수 없다.” 말은 그의 몸이었지만 그의 영혼도 될 수 있었다. 나는 생산성이 최고에 달할 시기에 들어서기도 전에 탈진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탈진 때문에 사역을 그만두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부정한 행위로 탈출구를 찾다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스캔들을 부른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60대, 70대, 80대에도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그분을 섬기고 싶다. 지금부터 20년 후, 중요하고 귀한 경험은 얻었으나 동기나 기쁨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정원을 가꾼다면 우리는 남들까지 먹일 만큼 풍성한 소출을 얻게 된다. 어쩌다 한번씩만 정원을 돌본다면 그저 나 먹을 만큼 거둘 것이다. 정원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너무 배고파 남의 것을 먹고 사는 ‘소비자’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자신의 영성을 발견하는 것은 바른 목표-하나님을 알고 내 인생에 대한 그분의 사명에 순종하는 것-를 이룰 수 있는 방편이다. 청교도들은 안식일을 ‘영혼의 장날’이라 불렀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유독 더 많은 시간을 내는 특별한 날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우리 중에 지름길을 택하여 하나님의 양식을 받지도 않은 채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길에는 재난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영적 기질을 다른 것보다 낫게 여기는 것도 또 다른 유혹이다.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지나치게 높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 초고를 검토해준 한 목사는 여백에 이런 글을 남겼다. “목사들은 예배에 대해 칭찬은 별로 못 듣고 비판만 많이 받는데, 이 책이 그 이유를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마음에 들어갈 교인들은 어차피 9분의 1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내 친구 목사 말이 맞다. 교회마다 서로 상충되는 기질들이 가득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드리는 1시간의 예배로 모든 사람의 영적 필요가 다 채워져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기대다. 자기만의 규칙적 경건생활로 공 예배를 보완할 필요가 있거니와 이 책을 통하여 그 작업이 더 쉬워졌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적 소명과 이웃에게 다가가는 방법에 얼마든지 주력할 수 있다. 자기 나름의 신앙, 기도, 예배 생활을 개발해 그것으로 교회 생활을 살찌우는 것이 휠씬 건강한 접근이다. 교회 예배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쪽에서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라. 당신의 시각이 반영된 예배가 아닐 수 있으나 예배 인도 담당자들은 당신의 영적 기질로부터 뭔가 배울 수 있다. 그들은 당신의 제안을 매 예배마다 반영할 뜻은 없을지 몰라도 몇 주에 한번 씩은 고려할 수도 있다.
영적 성장의 처방전은 한 가지만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감히 우리의 제한된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 크다. 휠씬, 휠씬 크다.
지금 내 정원 상태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다. 잠깐 생각해 보라. 우리는 각자 빈 땅 위에 서 있다. 아름다운 정원 - 하나님의 사랑, 친밀함, 교제-을 만들고 가꾸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은 천지를 두루 살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다.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치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그분께로 향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시지 않는 시간은 1초도 없다. 당신이 하나님과 누릴 수 있는 관계는 그분이 어느 누구와도 맺지 않으실 독특한 관계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은 당신과의 관계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뜨겁게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와 다윗과 마리아에게 그러셨던 것만큼이나 당신을 간절히 알고 사랑하기 원하신다. 당신도 그분께 이 신앙의 영웅들 못지않게 귀한 존재다.
그러나 이 신앙의 선배들 -모세와 다윗과 마리아-각자는 시간을 들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꾸고 키워갔다. 저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마음의 최대 열정으로 삼았다. 당신도 오늘 이 초청에 응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