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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네일아트로 개척한 미국이민의 길


 제임스 킴과 아내 수잔정씨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다.’ 로신의 이 명언은 글로벌시대를 맞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희망을 안고 미국이민이라는 미지의 길에 들어선 오늘의 주인공 네일아티스트 제임스 킴사장님의 심경고백이다.

제임스 킴사장은 지금 뉴욕 북부에 위치한 베드포드 (Bedford )타운에서 와이프 수잔 정씨와 함께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뛰여넘고 네일아트로 미국의민의 길을 개척하여 현재 수준급의 규모를 갖춘 네일살롱 두개를 활기차게 운영해나가고 있다. 베드포드타운은 미국의 유명한 인사들이 모여사는 최고급주거지로서 이름만 들어도 다 알만한 정치인들과 패션디자이너, 할리우드 배우, 음악가들이 모여 사는 부자동네이다.

길림성 룡정에서 태여난 그는 여섯 살부터 료녕성 철령시에서 자랐다. 어릴때부터 그림그리기에 남다른 재주와 흥취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릴때면 시간가는줄 몰랐다. 화가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였지만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그 꿈을 펼칠 수가 없었다.

식당들을 운영하면서 잔뼈가 굵어지다

고중을 졸업하고 그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식당을 운영하는 누님을 도와 나섰다. 1988년 열하홉살이 되던 해에 그는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담대하게 형님과 함께 철령시에 자그마한 조선족 냉면집을 개업하였다. 돈을 빌려가지고 집세가 제일 싼 곳을 찿다보니 땅바닥마저 꺼지고 패인 채소가게를 임대할 수밖에 없었다. ‘환경보다 냉면맛이였던지 비록 초라한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누님한테서 전수받은 비법으로 만든 조선족냉면은 지금 말대로 완전대박이였다.

3개월뒤에 빌린 돈을 다 갚고 식당 바닥까지 콩크리트로 반듯하게 바꿔놓았다 .

영업이 잘 된다는 소문이 나자 일년이 되여갈 무렵 건물주인이 무리하게 집을 되찿는 바람에 철령시 문화로에 있는 상가에 두 형제가 고객들과도 형제와 같이 함께 한다는 이중의 뜻으로 兄弟酒家를 개업하였는데 예상보다 영업이 더 잘 되었다.

그는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고 식당을 운영하는 한편 동북삼성 일급 요리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배워 료녕성2급 요리사자격증을 취득하였고 레스토랑트 경영에 관한 공부도 짬짬히 하면서 비지니스 맨의 수양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1991년에 그는 우물안의 개구리에서뛰쳐나와 북경에 진출하여 하이댄취(海淀区)동북조선족미식성(东北朝鲜族美食城)’을 과감하게 오픈하였는데 그가 만든 조선족 요리와 냉면은 북경에서도 대환영을 받았다.

그후 그는 한국에 가서 거의 2년남짓이 삼원 지하철 회사에서 일하는 한편 한국음식문화에 대해 깊은 흥취를 가지고 요해하면서 새로운 사업구상을 안고 귀국하였다.

그는 특별 초빙한 한국요리사와 중국요리사를 모시고 전통과 특색이 있는 중한음식 으로 철령시에서 규모가 제일 큰 한국미식성(韩国美食城)’ 레스토랑트를 성황리에 개업하고 그 옆에는 현대식 노래방도 함께 운영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모았다.

식당규모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비즈니스세계에서 그의 잔뼈들은 점차 굵어졌고 자신감도 커져갔다.

태평양 건너에서 날아온 요청장

1999년 미국 텍사스에 있는 컴퓨터회사 총경리 제니퍼한테서 반가운 요청장이 날아왔다. 자기저택 주위에 넓은 땅들이 많으니 건축할만한 친구들 몇명을 데리고 미국을 방문하라는 것이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친구사귀기를 좋아하는 그가 북경에 있을때 지인을 통해 만났던 미국친구였다. 더 넓고 큰 세상에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창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미식성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안해가 기꺼이 맡아보기로 하였다. 정예부대 건축팀 7명을 뽑아 비자를 신청하였는데 이유불문하고 거절당했다. 제니퍼가 건축은 안해도 무방하니 비지니스맨으로서의 그 패기만 지니고 미국에 한번 오라며 재차로 되는 강력한 요청장을 보내주었다.

 

다시 찿은 화가의 꿈

199912월에 호기심과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미국에 첫발을 들여놓고보니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들이 겹겹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우선 텍사스, 로스안젤레스에서 중국식당이며 일식집이며 건축현장을 찿아다니며 찬밥 더운밥 가릴사이 없이닥치는대로 일하였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추운 겨울날 친구의 소개로 뉴욕에 도착해보니 습기찬 반지하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에도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였다.’

적성에 맞는 미국이민의 길을 찿아 뉴욕까지 오게 된 그는 우연히 네일살롱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다. 도화지가 아닌 작은 손톱에 다양한 칼러의 조합과 예쁜 디자인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다양하게 그려가면서 그는 그동안 자신의 잠재의식속에 깊이 잠들고 있었던 미술적감각과 재능들이 꿈틀거리며 깨여나는 환희를 느꼈다.

아하! 바로 이거야!’ 행복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자신이 쌓아온 경험에 의하여 한중고객층을 위주로 미국에서 식당을 경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네일기술을 배우면서 미국에서의 네일문화는 상당히 발달되어 있고 그 시장은 수요가 아주 많으며 주된 고객층은 미국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뒤늦게 도로 찿은 화가의 꿈은 그토록 매력적이였고 더이상 놓칠 수가 없었다. 미국에 온 이상 새롭게 미국인을 상대로하는 네일아트 비즈니스에 패기있게 도전장을내밀었다.

눈치로, 메모로, 학원공부로 배운 영어

갈길은 정해졌으니 길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영어관부터 넘어야 했다. 맨처음에는 매니큐어(손톱손질), 패디큐어(발톱손질)등 몸짓언어로 고객들과 대화하고 점차적으로 고객들이 자주 말하는 간단하고 일상적인 대화는 눈치로 알아들었으며 모르는 대화들은 웃음으로 대체하면서 거의 반벙어리로 힘들게 일했다. 저녁이면 퇴근하기 바쁘게 빵 한조각을 들고 영어학원에 가서 절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다시 반지하실 집에 도착해서는 밤늦도록 숙제들을 완성해갔다. 잠자는 시간이 겨우 네시간정도밖에 안되었다.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틀리건 맞건 대담하게 미국인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그는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미국인들은 설사 우리가 틀리게 영어로 말한다 해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때문에 친절하게 잘 대해준다며 절대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평소에 미국인들의 대화를 귀담아 들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들과 필수적인 말들은 수첩을 갖고다니면서 메모하는 습관을 양성하였는바 메모수첩이 두꺼워갈수록 실전에서 배우는 그의 영어수준도 나날이 향상되었다.

 

길이란 용기있게 첫발자국을 내딛는자의 발밑에 있다

희망을 안고 용기있게 첫발자국을 내딛는자의 발밑에 길이 있다. 열심히 걷다보면 길이 보이고 그 길이 더 넓어지며 다른 길도 보이게 된다.’ 그의 확고부동한 인생철학이였다.

2006년에, 미국에 와서 5년만에 그는 그동안 악착같이 모아온 종자돈으로 영업이 침체상태에 이르러 파산의 지경에 이른 자그마한 네일가게를 인수하였다. 그것도 가진 돈이 부족하여 나중에 갚는 것을 전제로 하고.

본전마저 날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모험이 없이는 미국이민의 길을 개척할 수 없으며 이런 미지의 길에 과감하게 첫 발자국을 내딛는 것이 이방인인 자신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박력있게 추진하였다.

이렇게 뉴욕의 부자동네인 베드포드타운에서 중국 조선족이 운영하는 첫 네일가게가 빈약하고 미약한 모습으로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났다. ‘그 나중은 창대할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안고.

그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네일아트들을 전시해 놓았을뿐만아니라 손님들이 유튜브에서 찿아서 들고오는 도안들도 즉석에서 그려줄 수 있었고 또 손님들이 말하 는 요구에 맞추어 선자리에서 상상력을 펼치가며 아름다운 도안을 설계해 주었다.

손님들의 피부타입, 손모양, 손톱모양, 선호하는 아트 등에 맞추어 그들만이 원하는 개성있는 손톱을 만들어주었고 그들의 대화에 귀기울이며 한번 찿아온 손님은 단골로 만든다는 마음가짐으로 손님들 한분한분에게 최상의 실력과 최선의 서비스로 따뜻하고 열정적으로 대했다.

미국에서도 개업한지 3개월만에 정확하게 나머지 돈을 다 완불하였다. 한시간 이상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어져 800 스퀘어피드밖에 안되는 작은 네일가게가 날이 갈수록 비좁게느껴졌다. 게다가 비지니스가 잘 되자 건물주인이 몇해사이에 임대료를 배나 올렸다.

길을 개척하고보니 더 좋은 길이 보이기 시작

네일아트라는 길에 첫발자국을 내딛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알차게 걷다보니 때가 되어 더 좋은 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2년반뒤에 뉴욕 베드포드타운에 아름답고 산뜻하게 장식된 Chois Nail (선택받은 네일)살롱을 두번째로 오픈하였는데 면적이 2.600스퀘어피트로 처음가게의 세배이상이 되었고 부인 수잔 정씨와 직원 10명과 더불어 행복한 분위기가운데서 손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쵸이스네일을 힘차게 운영해갔다.

3년전에 그는 베드포드타운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는 건물자체는 비록 낡았지만 40대의 차량을 파킹할 수 있는 아담한 쇼핑몰전체를 통이 크게 구매하고 근 2년간의 대형공사를거쳐거의새롭게 건축하였다. 그는 다시 한번 모험을 무릅쓰고 불가능에 과감히 도전하여 지역교포사회와 자신의 이민생활의 길에서 놀라운 쾌거를 올렸다.

그 쇼핑몰중에서3.800스퀘에피트에 달하는 큰 건물을 새롭게 디자인하여 호화스럽고 고급스러운 Jast For you Spa(바로 당신을 위한 스파)네일살롱을 세번째로, 그것도 자기의 건물에서 성공적으로 오픈하였다.

지금 부인 수잔 정씨는 쵸이스 네일살롱을, 그는 쟈스트포유 스파살롱을 맡고 있는데 17명이나 되는 직원들로도 일손이 딸릴때가 많다.

베드포드타운이라는 부자동네의 특성을 감안하여 높은 서비스와 다양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고객층을 염두에 두고 세련된 감각과 고급화 전략으로 서비스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 페이셜, 맛사지, 왁싱 등 스파의 개념을 더해 고급화되고 다양한 기술을 도입하여 고객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있다.

그는 초심을 잃지 않고 성실, 신용, 열정을 시종일관 자기의 비지니스에 관철시키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 먹고 싶은 음식이 있듯이 고객들이 가고싶어하는 네일살롱을 꾸리고 고객들이 만나고싶어하는 네일아티스트로 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하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그의 네일살롱에는 베드포드타운에는 물론 인근도시에서 2시간 반이나 운전하여 오는 장거리 단골손님들도 있다.

그중에서 롱아일랜드에서 오는 테뤼샤, 나타리 그리고 코네티컷에 오는 쎄뤼, 타롸 등 손님들이 가장 인상이 깊다. 한시간밖에 안걸리는 네일미용을 받기 위하여 그들은 왕복 다섯시간을 운전하고 와서는 내 집처럼 편한 네일살롱이예요.’, ‘나의 변호사, 의사가 있듯이 미스터 킴은 나의 네일아티스트예요.’하면서 그렇게 즐거워 할 수가 없다.

고객중99%가 백인이며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들도 간혹 찿아온다. 문화가 다르다보니 미처 명배우인지도 모를때가 있는데 손님들이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싸인을 받고 기뻐한다. 글랜, 지타, 블레이크, 캐루이 등 할리우드 배우들이 다녀가면서 살롱의 인기도 높아졌다.

비지니스를 하다보면 살롱이 힘들때도 있는데 그럴때일 수록 손님이 적다고 절대 소홀히 대하지 않고 또 손님이 많다고 서두리지 않으며 기다리던 손님이 설사 떠날지라도 내가 서비스하고 있는 손님한테 초점을 맞추고 항상 똑같은 서비스로 그 질과 아름다움을 보장해 주고 있다.

직원들이 행복해야 손님들에게 행복한 네일서비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직원들과 상부상조하며 가족과 같은 분위기로 일하고 있는데 8,9년씩 함께 일해온 직원들도 있다.

동포들과 더불어 행복한 이민생활을 꿈꾸며

그는 조선족동포들에게 늘 깊은 애정을 지니고 그들이 처음 미국에 정착할때면 자기집에 잠자리를 안배해주고 운전을 도맡아해주며 지금까지 부인 수잔 정씨와 함께 우리교포들에게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주고 있으며 더우기는 영주권을 취득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한테서 네일기술을 배워 현재 가게를 운영하는 자랑스러운 교포들도 여러명이나 있다.

하지만 이민초기에 영어관을 제때에 넘지 못하여 능력은 있으면서도 감히 하고 싶은 일에 도전을 못하고 오랜 세월동안 고된 육체적 노동에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마음에는 큰 상처를 입고 귀국하거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도 있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들과 경험이 미국이민생활을 꿈꾸고 있는 고향에 있는 조선족들과 미국이민생활에서 아직 길을 찿지 못해 방황하는 동포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인터뷰에 나선다며 재삼 강조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그는 우리 동포들이 다 함께 행복한 이민생활을 영위할 것을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네일아트라는 이민의 길도 처음부터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이 아니였다. 타고난 미적감각과 뛰여난 기술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10여년간 꾸준히 걸어온 네일아트라는 이민의 길에서 지금은 그는 드라이크리닝 세탁소, 코인 세탁소 등 다른 길들을 보고 있으며 또다른 쇼핑몰을 개발할 멋지고 황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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