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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한인사회의 어제와 오늘

 


 

통계에 의하면, 2007년 말 현재 호주에 거주하는 한국동포의 숫자는 7만의 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실 호주 이민 한국전쟁 직후에 시작된 한국 동포들의 호주이민사는 이제까지 사실상 양적 성장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 호주 인민 사회는 어떠하였을까?


 

초창기 이민에 대해 김인기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당시 한인들이 호주에 도착한 이유는 명백하지 않으나 1895년에 한국에 파견된 호주 선교사들이 목회 사명을 마치고 호주로 귀국할 때, 양 자녀를 데리고 온 것을 한국 사람의 이민초기라고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호주정부 이민사를 고찰하면 적은 규모의 한국인들이 호주에 거주한 증거도 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1921년부터 1941년 사이 호주로 유학 온 사실도 있는데 재미교포 학자들은 다시 미국으로 이주한 사실이 있다지만 확증할만한 기록이 없어 의구심을 표하게 됩니다.

 

호주 이민성은 한국인들의 공식적인 호주 유입시기를 한국전쟁 시기인 1950-1953년 사이로 잡으면서 전쟁미망인 들이 군인을 따라 호주에 오고 전쟁고아들이 이때부터 호주 가정에 입양되면서 이민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누군가 한인역사에 관심이 있어 구체적인 기록이라도 남겼다면 상세히 소개를 할 수 있겠으나 이민변천은 오늘날까지 이렇다 할 만한 소개를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호주 한인회, 그 시작


 

호주 한인회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1968년 한인회가 창립되고, 초대회장으로 우제린 박사가 추대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초대 회장이었던 우제린 박사의 증언에서 호주 한인회의 시작을 1968년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말한다. “호주 한인회가 시작된 것은 1968년 12월 말 경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 당시 대사였던 이동환 대사와 20여명의 한인들이 시드니 시내에 있는 만다린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연말 파티겸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인회의 필요성과 한인회의 설립에 관한 말이 나왔고, 당시 한국에서 호주에 온지 가장 오래된 제가 회장을 맡기로 하고, 그 당시 최영길이 총무를 맡았지요. 그 당시는 투표도 안했고, 먼저 왔다고, 모두가 저를 추천해서 만장일치로 회장이 된 것이죠. 그 후 우리는 ”한인회“ 라는 이름으로 야유회 등 모임을 자주 가졌습니다. 이것은 초대 회장을 역임한 우제린 박사의 증언이다.

 

아쉬운 것은 초대 한인회장 및 한인회의 결성과 관련하여 보존되어 있는 자료는 전혀 없다. 다만 당시 한인회 결성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생존해 있어 그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한인회의 결성은 시드니 한인회의 조직화라는 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써 다른 나라의 한인회와 비숫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되었다. 회원 간의 친목도모와 권익옹호 그리고 정보교환 등이다.

 

그러나 시드니 한인회는 출범과 함께 한인회관 건립모금을 시작함으로써 한인사회의 성장에 대한 확신과 이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호한협회(Australia-Korea Society)의 행사에 나가 그들과 교류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초기 이민자들의 증언 가운데 흥미를 끄는 점은 “한인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1968년 이전부터라는 주장이다. 1967년부터 “무역협회 시드니 사무소” 관장 홍정표가 한인들의 모임에서 한인회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하였고 1968년 중반 박정희 대통령의 호주 방문과 관련하여 강종수가 한인회의 성격을 띤 모임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한편 조기성 전직 한인 회장은 한인회 전관을 통과 시킨 1970년 8월 17일을 공식적인 한인회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러 차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과 초기 이민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분석해 볼 때, 호주 한인회의 설립은 1968년 12월 27일 우제린 박사가 1대 취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초대부터 역대 회장의 임기를 처음 정리해 놓은 문서자료는 1982년 13대 한인회가 발간한 화보이며, 그 이후 지금까지 큰 이견 없이 이러한 기준을 따라왔다. 초기 한인회와 현재 한인회의 기본적인 활동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한인회를 중심으로 회원들과의 친목과 정보교환 등이 주로 이루어졌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춘계 및 추계 야유회를 개최하였다.

 

우제린 박사가 회장으로 있을 초기 한인회는 주시드니 총영사관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 하였는데, 총회와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운영위원회 회의를 주로 영사관에서 열었으며 공간에는 거행하는 국경일 행사에 한인들이 대부분 참석 하였다. 또한 한국에서 고위 관료들이나 유명 인사들의 호주 방은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곤 했다. 우제린 초대 한인회에서 총무를 역임한 최영길은 1970년 9월에 자연스럽게 2대 한인회장직을 이어 받았다. 그 이후에 대하여 김인기님은 초창기 한인회에 대해서도 다음과 정리하였다. "연대를 살펴보면 우제린, 최영길, 조기성, 이경재, 유의규, 신경선 여섯 명의 한인회장이 1968년부터 1977년 까지 9년간 제8대 회장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교민의 고리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꿰뚫어 연결하여 왔습니다.

 

9년간 우제린박사의 초대회장을 비롯하여, 2,3,4,6대의 최영길 회장, 조기성 회장이 5대의 회장직을, 이 밖에 이경재, 유의규, 신경선 세분이 1년간의 회장직을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런 년 수를 고찰한다면 어떤 분은 1년의 봉직을 끝을 맺지 못하고 임기 중 회장이 바뀌든가 개인사정으로 사표를 내고 물러 나간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

 

사실 제 1대 우제린 호주 한인회장 때(1968년) 한인회의 설립은 아직 백호주의가 버티고 있었던 만큼 100여명에 불과한 동포사회가 서로 도와가며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삶의 터전을 닦아가려는 그 노력 자체였다. 한국전쟁 직후 설치된 공관의 직원, 콜롬보 계획으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러 온 공무원, 지질학 분야의 기술자, 헬리콥터 조종사, 소수의 상사직원들이 호주 동포의 모두였다.

 

호주 이민이 구체적으로 진행하게 된 것은 1973년부터 이다. 그때 한인들이 월남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서서히 호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는 호주의 위틀럼 (Gough Witlam) 노동당정부의 백호주의 포기선언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지만, 월남에 피, 땀을 팔아 돈을 벌던 소수의 참전군인, 사업가들이 좀 더 나은 돈을 위해 호주 행을 택했던 것이다. 외화획득이 고국의 최우선과제였던 이 시기에 이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국의 해외개척자였다. 50여명에 불과했던 이들의 호주 행은 1974년~6년까지 월남전과 관련해 이미 해외에 눈을 돌리던 500여명의 젊은 개척자들을 호주로 불러들이는 신호탄이 된 것이었다. 이외에도 지질학자. 헬리콥터 조종사, 교사 등 전문기술자들의 이민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위틀람 정부 역시 비자간소화 정책으로 이들의 호주이민을 장려하고 있었다. 1976년 초 사면령으로 영주권을 취득한 이들은 이제 합법적인 신분으로 한국의 가족을 초청하기 시작하였다. 짧게는 2-3개월 안에 가족들을 맞은 이민 1세대들은 청소, 용접업, 택시 등 힘든 육체노동을 마다 않고 열심히 일하면 쉽지 않은 이민생활을 꾸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1976년 사면령은 남미 특히 파라구아이에 있는 동포들도 상당수 불러 들렸고, 이란 등 중동에서 일하던 일부 한국인들도 호메이니 정권으로 바뀐 것과 맞물러 호주로 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70년대 후반기에 호주로 온 많은 한인들은 1980년 초 제 2차 사면령으로 모두들 합법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초청하였다. 아직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고국의 가족에게 비행기 표를 사 보내 맞은 가족들과의 상봉은 수년간의 외로움을 참아내고 땀으로 일궈낸 작은 보금자리에서 맛보는 짜릿한 행복이었다. 총영사관의 통계는 1980년 가족초청으로 온 한국인이 급증하여 이제 한인동포사회는 6000명을 넘어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1980년 전반기에는 이미 호주이민의 탄력이 붙어있어 특별한 계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6~700명씩 영주권을 취득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호주 동포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취업 기회가 확대되고, 결혼 등 가족 초청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이 시기에 이민이 본격화 되지 못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한국이 군부정권으로 그리 개방적이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호주 경제 역시 침체되기 시작하여 이민대상지로 캐나다와 미국에 밀려 그리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주목할 만한 것은 호주인 들이 한국고아들을 많이 입양했다는 사실이다.

 

1985년 이후 또 하나의 이민 물결이 밀려든다. 그것은 1988년 호주건국 200주년을 기해 사면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 이었다. 한편, 1987년부터 호주정부 차원에서 호주유학을 독려하는 교육 EXPO를 한국에서 열기 시작하였다. 당시 학생비자는 학비만 내면 누구든 올 수 있었다. 1988년 사면령 기대와 맞물려 꽤 많은 학생들이 들어왔다. 당시 점차 미국 돈과 호주 돈이 격차가 벌어지면서 미국에 비해서는 아직도 저렴한 학비가 매력적이었다. 1988년 사면령 기대감은 허망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당시 호주의 불경기 탓에 학비감당이 어려워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새로운 이민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자본을 끌어 들이려는 호주 경제 불황 타개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것은 투자이민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였다. 이 새로운 이민카테고리는 당시 중국으로 반환이 임박한 홍콩 사람들을 받겠다는 의도였으나. 올림픽을 전후하여 적지 않은 부를 축적해가던 한국인들에게도 역시 매력적이었다. 당시 30만 불 정도의 재산이 있고 한국에서 사업경력이나 기업의 간부경력만 있으면 아무나 받든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투자이민의 문호는 넓었고 수천 가족의 투자이민들이 한국에서 돈을 들고 시드니뿐만 아니라 브리스베인 골드코스트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이전 호주 이민들과는 달리 일을 찾아서가 아니라 평안한 노후, 특히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호주로 오고 있었다. 투자이민은 1987년부터 1993년 정도까지 5~7천 명 정도 이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93년 이후 투자이민은 주춤해졌다. 호주의 정가와 주류사회에서 투자이민에 대해 실패한 정책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아니면 필요한 외국자본을 이미 끌어 모았거나, 홍콩이민이 더 이상 오지 않자 그만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 대안 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사업이민 제도였다. 이는 예전의 투자이민들이 호주에 오자마자. 바로 영주권이 부여되었지만 사업이민은 호주에서 2년간 사업결과 및 고용성과에 따라 영주권을 주겠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었다.

 

결국 투자이민의 매력을 없어지고 있었다. 한편 우리의 고국은 서서히 살만한 나라, 어느 외국도 부럽지 않은 "신토불이의 나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한편 상당수의 한국유학생들은 이즈음 중국천안문 사건을 핑계로 고국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중국학생들에 대한 호주 정부의 영주권 부여 특혜에 동승하고 있었고 1995년 초 대거 영주권을 받으면서 한국이냐 호주냐를 고민하고 있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올림픽으로 세계에 눈을 놀리기 시작한 한국의 첫발은 관광이었고, 호주 관광객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한국직항 비행기 취항으로 매일같이 한국관광객을 가득 실은 KAL과 ASIANA가 호주공항 여기저기에 수천 명의 한국 관광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골프관광으로 시작된 호주관광은 1995년 이후 가장 인기 있는 신혼여행 및 효도관광, 목적지가 되었다. 관광객 수의 증가는 우리 호주동포사화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교민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이제 큰 사업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호텔업, 관광회사, 여행사의 숫자와 더불어 젊은 사람이라면 가이드 한번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편 1998-1999년까지의 IMF 상황은 호주 동포경제까지 여지없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우리 동포사회는 다시 한 번 고국의 경제와 고국의 정치상황이 이곳 동포사회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향수병 수준의 애국심이 이제는 지구촌시대의 고국에 대한 강한 연대감을 의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시드니 동포사회는 한인회가 널찍한 한인회관으로 이사하면서 좀 더 조직적으로 동포사회의 힘을 모으고자 노력하고 있었고, 고국은 세계 속의 한국으로 우뚝 서가고 있었다. 이제 한국에 사는 것도, 호주에 사는 것도, 그리 큰 차이가 없어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말을 못하면 좀 창피해지고, 한국에서 온 비디오와 음악에 동포사회의 1.5세대, 2세대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있어, 특기할 만한 사항은 90년대 후반 호주로의 이민 문호가 제한되면서 뉴질랜드로 갔던 한국인들이 뉴질랜드 시민권을 획득한 다음 대거 호주로 들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시드니 거리에서 유학 온 초등학생을 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고, 아이들 교육 때문에 호주에 일정기간 거주하는 기러기 엄마, 기러기 아빠들이 동포사회에서도 당당히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워킹 할리데이 비자를 통해 호주에 온 청년들이 영어도 배우고 일도 하면서 호주 동포사회에서 배우기도하고, 상처 받기도 하면서 또 하나의 동포사회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의 호주이민의 문호는 어느 때 보다 닫혀있는 듯하다. IMF를 거치면서 고국에서는 영어공부 혹은 해외 이주 대상 지역으로 호주를 최우선국가로 인식하고 있지만, 호주 정부의 문호는 기술이민이라는 이름하에 젊은 고급 인력에게만 제한적으로 열려있을 뿐이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러 2011년 현재 시드니 동포사회는 가시적이고도 구체적인 발전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100여명 시대의 한인회가 7만여 명의 대 식구를 가진 조직으로서 면모를 갖추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제는 동포사회가 가지고 있는 각계의 전문 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우리 동포사회의 장래에 대한 청사진을 논의하고 그려나가야 할 때이다.

 

그것은 곧, 이제 고령이 되신 1960-70년대 동포사회를 개척해 놓으신 이민 1세대들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일차적인 작업이요, 그 다음은 2세대들과 3세대들이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그 기반을 닦아 반만년 역사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새로운 땅 호주(Australia)의 이민자로써 큰 역사를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글 / 사진_ 이성용 기자

 

[사진설명]

호주1 (main L) : 센트럴시드니.

호주2 (m) : 오페라하우스.

호주3 (m) : 써큘러 키.

호주4 (s) : 하버브릿지.

호주5 (s) : 시드니 호수.

호주6 (s) : 호주 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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