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2009년 야월교회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준공 예배가 있었다. 이날 한국교회역사연구원 김수진 원장과 총무 이성용이 참석을 하였었다. 이날 김삼환 목사는 “순교자의 신앙 본받아 복음의 증인이 되자”란 설교였다. 북한 공산군이 행한 꿈찍한 종교 탄압이었다. 야월도 교회의 시작은 이러하다. 1908년 4월 5일 광주 선교부에서 사역하던 배유지(E. Bell) 선교사가 목포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던 중 야월도를 발견하고, 이곳에서 섬 주민들 몇 사람을 모아 놓고,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야월교회의 시작이었다. 야월리는 영광군 염산면에 속한 섬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야월도라고 불렀다. 그 섬에 가려면 염산면 봉남리 선창에서 배를 타고 가곤 하였다. 해방되어 간척 사업을 하여 육지가 되었고, 야월도의 그 넓은 들녘은 염전이 되어 많은 소금을 생산하게 되어 야월 소금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소금으로 편안하게 살고 주일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야월교회에 모여 예배하며 사는 축복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 인민군들의 탄압으로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일로 염산교회와 야월교회는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징발당하고 이 지역은 인민군들의 세상이 되고 말
이번 정인이 아동학대사건의 주범인 장하영씨와 안성은씨는 독실한 기독교 목회자의 자녀이고,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하는 한동대 캠퍼스 커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중적인 삶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은 EBS 입양가족 다큐멘터리 '어느 평범한 가족'에 출연하여 "입양은 축하받을 일"이라며 입양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안성은 씨는 CBS직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 편집인 입양된 이후 정인이의 모습은 점점 변해 갔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골절되고 장이 끊겨져서 죽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점점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 편집인 이들 부부는 모두 신실학 목회자의 자녀들이었고 미션스쿨인 한동대 커플이었고, 안성은씨는 CBS직원이었다. © 편집인 장하영씨는 아동학대 범죄처벌등에 관한 특례법위반(아동학대치사)등 으로, 안성은씨는 아동복지법위반(아동학대) 으로 기소된 상태이다. © 편집인 그러나 검찰은 살인죄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 편집인 이들이 입양을 한 것은 2자녀 이상이면 아파트 를
진영논리가 우선하는 한국정치, 리더십의 부재 우려 목소리 높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적폐청산에서 시작해 최근 검찰개혁 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정치사회의 갈등의 골이 계속 깊어져 왔다. 통합의 정치보다 진영논리 중심의 편 가르기와 분열, 그리고 대립과 갈등이 일상화된 정치 현실에서 리더십의 부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 정치에서 리더십의 부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큰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방 정국 이래 지금까지 한국 정치는 좌우 이념 대결 구도에서 통합의 안정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대통령의 리더십이 통합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헌신적 노력과 희생을 보여준 경험이 우리 현대사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등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경험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와 같은 불세출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한국 정치는 포용보다는 배제에 익숙한 모순된 현상을 보여준다. 지금과 같이 자기 진영의 이익만을 지키기 위해 협상 파트너인 상대방을 철저히 배제하는 ‘배제의 정치’에 익숙한 대통령의 리더
지금까지 수백번의 위기를 겪으며, 국난을 해결하고, 대한민국을 지켜온 수많은 영웅들의 삶이 존재한다. 펜데믹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각종각분야에서 위기의식과 힘겨움을 통해 사회적 전반적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상황이다. 어느날 풍랑이 닥친것처럼, 그야말로 지금은 어떤 말한마디라도 잘못하면, 그를 심판대에 올리고 손가락질 당하기 딱좋은 때라는 말을 우스개소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려울수록 비젼을 말하고, 희망을 말하는 지도자가 누구일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라는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비젼을 말하고, 각분야에 준비된 사람들이 희망의 목소리를 높여주어야 할때이다. 여러각도에서 우리는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안타까움을 만나고, 괴로움을 만나는 현실이다. 하지만 움추릴수록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듯이 빠른 판단과 결단 방법을 달리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정부방침에도 펜데믹은 진정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어느새 1년이란 시간동안 전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았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각분야에서 기업 순위가 바뀌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금방지나가겠지!로 버텨오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에 직
© 편집인 통합총회바로세우기 행동연대가 사회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다. 피고는 총회장이다. 소를 제기한 이유는 12개 노회가 헌의한 것에 대해 총회가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불법 현실을 그대로 둘 수 없기에 총회 산하 12 개 노회가 제105회 총회에 ‘명성교회 수습안’ 결의를 철회해 달라고 헌의하였다. 하지만 제105회 총회장은 총회회의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정치부로 헌의안을 이첩하였으며, 현재 정치부 실행위원회는 제104회 총회가 재론동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습결의안 철회를 위한 헌의안을 다룰 수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으며 이를 총회임원회에 보고하였고, 총회임원회는 그 보고를 그대로 받아버림으로써 12개 노회의 헌의안을 무력화 시켜버리고 말았다. 이는 현 105회 총회 임원회가 헌법에 위배되는 ‘명성교회 수습안 결의’를 지켜주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법적 세습을 정당화 시켜주며 불법을 조장하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절차의 하자를 입증하지 못하는 한, 기각될 확률 높아 이 소송에 대해서 총회임원회는 경유기관에 불과하고, 최종 결정은 정치부가 하는 것이다. 헌의안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부의 배타적인 권한이고, 정
명성교회 송구영신예배에서 설교하는 김하나 목사 이날 예배는 김하나 목사가 설교자로 다시 서게 된 가운데, 비대면으로 드려진 예배지만, 매우 뜻깊은 예배 시간이었다. 이날 김 목사는 송구영신예배 설교자로 강단에 서서 명성교회 교인들에게 그 동안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심에 감사한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늘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총회의 절차를 밟으면서 진행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갖게된 강단권의 첫 메신저로서 서게 된 것이다. 강단권을 갖게 된 배경에는 예장통합 제104회 총회에서 '위임목사 청빙을 2021년 1월 1일 이후로 2017년 11월 12일에 행한 위임식으로 모든 절차를 갈음한다'는 내용의 '명성교회 수습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김하나 목사는 명성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위임목사로 시무를 목회를 시작한 것이다. '오직 믿음의 담대함이 있는 대장부로 살아갈때 하나님이 도우신다' 김 목사는 이날 열왕기상 2장 1-4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붙잡고 대장부로 살아가자’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겸손한 삶을 살았다. 우리도 다윗처럼 겸손하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며, 2020년도 지나가듯이 2021년도
2021년 새해가 밝아 왔다. 한국뉴스신문은 새해 벽두 CPOLITIKA 발행인 겸 편집인(정영호)과 한국뉴스신문(이성용)발행인이한국교회에 대해 대담 중에 한국교회 선교 이야기를 찿던 중 명성교회의 국내외 선교 이야기를 신년 특집으로 기사화했다. 마지막 설교의 영성 , 오직 주님 ! 오직 교회 ! 오직 기도 ! 작년 12월 27일 주일, 명성교회 김삼환 원로목사는 목회 50년 역사를 마무리하는 뜻깊은 예배를 드렸다. 이날 김 목사의 설교는 명성교회 한 교회의 역사로는 40년이며, 김 목사가 서울에서 목사로서 처음 사역했던 1971년을 기점으로 하면 50년 목회의 삶을 정리하는 회고적 성격의 마지막 설교였다. 이날 김삼환 원로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10절, 그리고 5절과 58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오직 주님 50년, 은혜의 50년 ”이란 제목으로 40년 동안 기도와 눈물, 그리고 열정과 사명으로 지켜왔던 강단에서 설교를 했다. 김 목사는 이날 설교를 통해 자신이 1971 년 2 월 4 일 갓 태어난 딸 소리를 데리고 12개의 라면 상자에 모든 짐을 싣고 중앙선을 타고 서울로 올라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전을 품고 사명자의 삶을 살기 위해
누림경제발전연구원(원장 박항준 교수)은 다가올 포스트-코로나시대를 대비하여 새로운 철학적, 사회적 가치 기준인 뉴 노멀을 제시하기 위한 칼럼을 기획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도 인류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상상하며 다양한 사회적, 기술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학자, 경제학자, 공학자 심지어 철학자들마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렴풋이 비대면 사회의 도래와 이로 인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변화가 있을 것을 예측할 뿐이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일수록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아직 학문적으로 완전하게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메타인지’는 ‘자신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우리가 존경하는 위인들은 대부분 ‘메타인지’ 능력이 높으신 분들로 자신들이 깨달은 원리를 다른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대입하셨던 분들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메타인지’ 능력 향상의 첫걸음은 무엇일까? 인류사의 흐름을 객관화해서 넓게 끊어 본다면 2천 년 주기적 관점이다. 우리는 이제껏 역사를 100년(Century) 단위로 읽어왔다. 그
오늘 하루가 가고, 내일이면, 김하나 목사가 명성교회 담임목사의 업무에 복귀한다. 김목사는 이제 2021년 1월 1일부터 공신력 있는 리더쉽으로 명성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김 하나 목사의 출발은 조용한 취임식 없이 업무를 시작하는 담임목사의 출발이다. 김하나 목사는 이제 2021년 1월 1일부터 공신력 있는 리더쉽으로 명성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김목사가 속해 있는 예수교장로회(통합)총회는 2018년 103회 총회에서 아들 승계가 부당하다 결정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예장통합 총회는 104회 총회를 열고 명성교회 수습안을 처리한 의결된 결과로, 김 목사를 2021년 1월부터 정식 청빙을 통해, 명성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도록 한 것이다. 총회의 폭 넣은 해석이 만들어 놓은 결과이다. 사실. 김하나 목사는 이미 지난 2017년 명성교회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2019년 총회 재판국이 김하나 목사의 청빙무효 판결을 내리며 제동이 걸렸고, 이에 대해 명성교회가 이의 제기를 하였고, 명성교회의 내놓은 안건을 위해 명성교회수습전권위원회가 구성되고, 결국 104회 총회에서 다시 명성교회 안건을 지지함으로써 김하나목사는 명성교회로 돌아와 위임목사로 업무를
우리나라에서 700만명의 관객을 돌파한 '보헤미안렙소디'의 주인공 프래디 머큐리는 1946년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의 비틀즈와 버금갈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여 박지성이 뛰었던 웸블던 구장에서 공역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노래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천재가수는 동성애를 추구하다가 에이즈병으로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1991년 11월 23일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환자임을 스스로 밝혔고, 그 다음 날인 11월 24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인한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했다. 프레디는 자신의 친구가 게이라고 폭로한 것에 대해서 격노하기도 해다. © 편집인 © 편집인 괘락과 화려함 이면에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던 것이다. 그것은 노래하는 수녀 자닌데케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빌보트 차트 1위까지 갔던 그녀는 쓸쓸하게 도미니크를 앵무새처럼 되뇌었지만 결국 동성애자로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다음의 노래를 부른지 얼마 안되어 자살로 세상을 마감하게 되었다. 도미니크, 니크, 니크 성인은 정말 소박하게 살다갔다네. 용병으로, 청빈하게 노래부르며 모든 길로, 모든 곳으로 그는
주세죽과 박헌영 얼마전에 문재인 대통령의 김원봉 서훈추서에 대해 보수진영이 반발해 결국 취소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서훈추서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미 노무현대통령이 공산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한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을 서훈한 바 있기 때문이다. 출처 연합뉴스, 주세죽의 딸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 ©편집인 주세죽은 러시아이름으로 카레예바이며, 박헌영(朴憲永)의 첫째 부인이다. 189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의 영생여학교에 2년 동안 다녔으며, 3·1운동에 참가하다가 체포되어 1개월 수감되었다. 1925년 1월 허정숙·박원희 등과 함께 조선여성해방동맹을 결성하였고, 그해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에 선임된 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7년 5월 김활란, 유영준,최은희,·박원민,정종명 등과 함께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를 결성하였으며, 1928년 11월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로 탈출하였다. 19
중심과 주변의 정의 ‘중심’이란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한 가운데를 말하고,‘주변’은 중앙에서 멀리 벗어나 있거나 떨어져있는 영역을 말한다. 중심과 주변을 특징짓는 것은 공간의 위치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차별을 의미한다. 중심은 지역, 정치, 경제, 사회, 인종, 언어,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주변과 비교할 때 우세하고 주변은 중심과 비교하였을 때 열악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중심은 계속 중심으로 남고, 주변은 계속 주변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경제면에 있어서는 부익부 빈익부로 가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학자 월러스테인(Immanuel Wallerstein)도 중심과 주변의 구도를 경제의 종속론을 통해서 해석했다. 전체로서의 세계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중심에서는 더욱 시장화, 상품화가 진행하고 주변에서는 특화된 저(低)자금으로 저(低)부가가치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양자간의 ‘부등가(不等價) 교환’에 의해 중심은 더욱 번영하고 주변은 더욱 주변화한다는 것이다. 중익중변익변이다. 중심은 주변으로 이동하고, 주변은 중심으로 이동해야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려면 중심은 주변으로 이동하고, 주변은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주변이 없는 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배 시, “나는 조덕삼의 마부였습니다” 하는 그의 설교에서 그의 겸손을.. 이자익 목사는 누구인가? 이 목사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서, 전북 김제의 대지주 조덕삼 (조세형 전 국회의원의 조부 )씨와의 일화로 유명하다. 이 목사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를 불쌍히 여기고 집에, 머슴 겸 마부로 받아들인 이가 김제의 대지주 조덕삼이었다. 대지주 조덕삼씨는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를 공부하는 그를 눈 여겨 보았고, 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했다. 두 사람 사이가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 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만나 함께 예수를 영접하면서였다. 1902년에는 ‘ㄱ ’자 교회 금산교회를 짓고, 그해 가을 동시에 세례와 집사 직분을 받았다. 1907년 장로 1명을 투표로 선출할 때 교회 설립자인 조덕삼이 안 되고, 마부 출신인 이자익 목사가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이때 조덕삼씨는 이를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고, 평신도로서 집사의 직분으로 교회를 잘 섬겼다. 그 당시만 하여도 신분 격차가 심하였던 상황을 본다면, 조덕삼 집사의 태도는 존경할 만한 신앙이었다. 특히, 조덕삼씨는
예배 시, “나는 조덕삼의 마부였습니다” 하는 그의 설교에서 그의 겸손을.. 이자익 목사는 누구인가? 이 목사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서, 전북 김제의 대지주 조덕삼 (조세형 전 국회의원의 조부 )씨와의 일화로 유명하다. 이 목사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를 불쌍히 여기고 집에, 머슴 겸 마부로 받아들인 이가 김제의 대지주 조덕삼이었다. 대지주 조덕삼씨는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를 공부하는 그를 눈 여겨 보았고, 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했다. 두 사람 사이가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 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만나 함께 예수를 영접하면서였다. 1902년에는 ‘ㄱ ’자 교회 금산교회를 짓고, 그해 가을 동시에 세례와 집사 직분을 받았다. 1907년 장로 1명을 투표로 선출할 때 교회 설립자인 조덕삼이 안 되고, 마부 출신인 이자익 목사가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이때 조덕삼씨는 이를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고, 평신도로서 집사의 직분으로 교회를 잘 섬겼다. 그 당시만 하여도 신분 격차가 심하였던 상황을 본다면, 조덕삼 집사의 태도는 존경할 만한 신앙이었다. 특히, 조덕삼씨는
© 편집인 전남에 위치한 광주는 빛의 고을이라는 뜻을 가졌다.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태조 23년(940)에 처음으로 쓰여졌고, 고려말의 3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이 「석서정기」에서 "光之州"라고 하여 빛의 고을로 해석하고 있다. 광주 사람들은 빛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이 오면서 광주는 진정한 복음의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진벨이 없이는 남도선교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선교의 열정메이커 였다. 그는 1898년에 목포스테이션을 만들어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목포진료소를 설립하였고, 인근지역에 선교를 하였고, 1904년 12월 20일에 광주에 와서 광주스테이션을 설립하여 교회와 광주진료소를 개소하고, 1906년 숭일중학교와 수피와 여고를 세웠다. 교회설립 유진벨은 목포처럼 선교스테이션을 만들면 항시 교회를 건립하였다. 북문안교회는 북문밖에 교회를 분리되면서 훗날 양림교회로 되었다. 배유지 목사는 선교 중심지에 항시 교회를 설립했다. 광주의 4대문 안에 예배당 지을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예배당 신축 부지를 정부로부터 빌려 교인들이 건축헌금으로 거금 40달러를 모았고 선교사들도 교인으로서 80달러